“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현재 연애로봇 서비스 테스트 진행 상황과 3년 전 초기 프로젝트에 비해 어떻게 나아졌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백윤호는 불 꺼진 회의실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의실은 어느새 스무 명 남짓한 임원들로 꽉 찼다. 임원들은 저마다 근엄한 표정 혹은 진지한 표정으로 백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한껏 비아냥대거나 기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3년 전, 회사의 미래를 결정하는 로봇 프로젝트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탓에 최고책임자였던 사장과 주변 인물들이 제거되었다. 그리고 공석은 그 밑을 지키던 팀장급들이 물려받았다. 극비리 프로젝트의 특성상 대외적으로 사장은 회사 내 횡령을 명분으로 해고되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높은 자리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사장은 그것에 대해 어떤 저항도 없었다. 한 직원의 죽음으로 끝난 이 프로젝트를 누군가는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 따라서 현재까지는 단계별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을 기준으로 프로젝트 15일이 지났는데, 초기 프로젝트에서 보인 오류는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깐만요.” 누군가 백윤호의 말을 끊었다.
“그 오류라는 게. 3년 전 유서린 사원이 죽은 원인 말하는 거죠?” 한 임원이 날카롭게 질렀다.
백윤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네, 그렇습니다.”
“도 넘은 집착 성향을 보여 결국은 연인을 살해한 채로 종료된 3년 전 프로젝트랑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뭐가 다르다는 거죠? 내가 알기론 그냥 메모리칩만 폐기하고 실물 로봇은 폐기 안 했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예, 비용 절감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3년 전 당시 원자재 비용 상승과 더불어 기술력 확보에 어려움이 있어서 즉시 처분이 어려웠습니다. 완전히 다시 만드는 것보다 기존의 것을 유지하고, 수정해 나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백윤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인간 뇌에 해당하는 물질은 로봇 실물이 아닌 메모리칩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교체하면 굳이 그동안 개발한 로봇 실물을 모두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이번에는 3년 전 그날처럼 치명적인 불상사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현재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있죠?” 이번엔 다른 임원이 질문했다.
“저택 내 CCTV와 열 감지 시스템,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LOVER-7의 메모리칩 자동 관리 프로그램으로 24시간 감시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조치할 수 있게 기업 내 경호업체도 근처에 준비시켜 놓았고요.” 백윤호가 자료를 관리 페이지로 넘기며 말했다.
임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백윤호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3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그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사실 서린이 죽은 후, 백윤호는 사표를 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잃을 만큼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회의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백윤호 팀장.” 현재는 임원이 된 그때의 팀장이 입을 열었다.
백윤호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회사에서 경호업체와 감시 시스템 강화에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만약 이번에 또 우리 직원에게 위협이 가해진다면, 그땐 정말 회사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겠습니다. 다들 동의하시죠?” 장내는 조용한 침묵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백윤호는 공허한 눈으로 그저 서 있었다. ‘누군가 죽어야 이게 끝나는구나.’
대체 회사란 무엇인가? 사람 목숨이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프로젝트를 완수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럼 회의 마칩니다. 추후 계속해서 상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임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그들은 엄숙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각자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골프 약속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찾았다. 백윤호는 이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자신과 윤서진, 그리고 3년 전 팀장과 유서린은 무언가를 완수해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지루한 회의 동안 심각한 척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는 척한 후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저들과는 달랐다.
“백윤호.” 선배가 다가와 백윤호를 불러 세웠다.
“예, 이사님.” 백윤호가 깍듯이 대했다.
“이사는 무슨. 됐고, 술이나 하러 가자. 회의 준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괜찮습니다. 관리팀에 현재 상황 어떤지 확인하러 가야 합니다.”
“됐어, 알아서 하겠지. 뭐 하러 너까지 가.”
“선배.” 백윤호가 멈칫했다.
“이번엔 진짜 잘 지켜봐야 해요. 이맘쯤이었어요. 서린이한테 문제 생긴 게.”
“윤호야. 지금 그때랑 다른 상황이야. 그래서 너 누구보다 오류 개선에 힘썼잖냐. 그래서 우리가 다시 여기까지 온 거고. 이번엔 달라. 서린이 그렇게 간 건 안타깝지만, 덕분에 너도 승진 빨리했고. 실패가 다 쓸모없는 건 아니야. 거기서 배우는 거지.”
순간 백윤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인간이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다. 사람이 죽었는데 실패에서 배운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선배는 백윤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떠들었다. “암튼, 이번에 성공하면 우리 진짜 탄탄대로다. 너도 임원 한 번 달아야지. 요즘 애들 뭐 승진에 관심 없다, 그러면서 책임은 죽어라 안 지려고 해요. 우리 때랑 너무 달라. 맘에 드는 놈은 너 하나뿐이다, 윤호야! 아주 성실하면 백윤호지, 안 그래!”
백윤호는 전의를 상실한 채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딱히 존경하던 선배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최악일 줄이야.
“가보겠습니다.” 백윤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선배가 술은 진짜 안 마실 거냐고 소리쳤지만, 백윤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미친놈. 그리곤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번엔 안돼. 윤서진은 안돼.’ 백윤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없이 빌었다. 그리고 윤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이?” 서진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일어나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영화는 한참 전에 끝나 있었다. 먹던 팝콘과 음료는 여전히 탁자 위에 있고, 서늘한 공기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뭐야, 어디 갔어." 서진은 의자에 걸린 가디건을 재빨리 걸쳤다. 아래층을 내려가 카이를 불렀지만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아파 물을 마시고 싶었다. 컵에 물을 따르고, 잠시 숨을 골랐다.
문득, 주방에서 발견한 반지와 사진이 떠올랐다. 서진은 컵을 내려놓고 사각지대에 놓인 천장을 열었다.
"없네..." 물건이 사라졌다. 서진은 계속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카이가 가져다 놓았다가 다시 치운 게 분명하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서진은 다시 천장을 닫았다.
띠리리링-. 때마침 백윤호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백윤호?"
"윤서진, 너 뭘 찾는 거야?"
서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뭐야, 설마... 보고있어?"
"카이는? 카이가 안 보이는데." 백윤호는 서진을 말을 제치고 다급하게 물었다.
"모,몰라. 자고 일어나니까 없던데. 잠깐 밖에 있나보지. 정원이나 별관에."
"별관? 화면 별관 쪽으로 돌려봐요." 백윤호가 관리팀에게 말했다.
별관에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그냥 소파에 앉아 있는데요. 아까부터 별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관리팀 직원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백윤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서진에게 말했다.
"들었지? 너도 계속 주시해. 긴장 늦추지 말고.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그나저나, 어디까지 진행했어?"
"거의 다 왔다니까. 이제 형식상 연인이야. 프로젝트 완료날까지 유지만 하면 돼. 생각보다 수월하던데? 진짜 사람같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이거 시장에 나오면 엄청나게 이슈일 거야." 서진이 대꾸했다.
"아, 근데." 서진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운을 뗐다.
"하나 걸리는 게 있어. 오빠, 카이 진짜 새 제품 맞아?"
백윤호가 물었다. "왜?"
"아니-,"
"서진-!! 밥 먹자!" 서진이 대답하려고 할 때, 카이가 집 안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어, 오빠. 일단 끊어봐. 나중에 다시 할게."
백윤호는 어딘가 불안한 마음에 다시 물었다. "왜, 뭔데?"
"별거 아니야. 이따 할게, 이따가." 서진이 급하게 통화를 끊었다.
백윤호는 찝찝하게 휴대폰을 끄고 CCTV 화면을 보았다. 카이와 서진은 대화를 나누며 요리를 시작했다. 꺼내든 재료를 보니 떡볶이를 해 먹을 생각인가 보다. 카이의 정상적인 모습에 백윤호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회의로 자신이 너무 예민해졌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요리를 했다. 백윤호는 그 장면을 보면서 아까 서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화면 별관 쪽으로 좀 돌려봐요." 백윤호의 요청에 직원이 별관으로 화면을 크게 띄웠다.
검은 인테리어에 소파 하나, 책 하나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방. 그냥 깔끔한 방이었다. 백윤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걸릴 게 하나도 없는데. 뭐지, 이 기분은?'
답답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삐익-!! 갑자기 관리시스템에 무언가 포착됐다.
"뭐야, 무슨 일입니까?" 백윤호가 소리쳤다.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팀장님! 별관 아래에서 뭔가가 터졌습니다!"
"그게 무슨, 화면 돌려봐요! 윤서진은! 윤서진은 괜찮은 거야?"
"팀,팀장님! 저기..."
직원은 급하게 주방 쪽 화면을 확대했다. 백윤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카이는 후라이팬으로 서진의 머리를 치고 기절시킨 뒤, 그녀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띠링-. 백윤호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메신저를 켰다.
'방금 터진 건 폭탄이었습니다.'
'집 안에도 설치했어요. 방해하면 윤서진 죽일 겁니다.'
"젠장-!!!" 백윤호가 소리쳤다.
"경호업체한테 연락해서 일단 대기하라고 하세요. 타겟이 우리 직원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지금 들어가면 안돼! 일단 카이랑 협상부터 해야 합니다. 뭐해요! 빨리 연락 안 하고!"
관리팀 모두가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백윤호도 계속 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쥐어짰다.
띠링-. 그때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오랜만이에요, 백윤호 팀장님.'
백윤호는 주먹을 꽉 쥐며 화면을 보았다. 카이도 곧 다가오더니, 싱긋 웃으며 그대로 손을 흔들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내 친구."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