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

by Nchips

카이는 잠든 서진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했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스크린에서는 작은 소음과 음악이 흘러나왔다. 서진의 미세한 숨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카이는 그 모습을 보며 사색에 잠겼다.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서진은 매력적이었다.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해맑은 미소, 그리고 눈빛.


하지만 곧 그것에서 빠져나왔다. 카이는 방문을 닫자마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와 서진을 겹쳐 보는 버릇은 고쳐야 했다. 3년 전, 카이와 그녀 사이를 갈라놓은 백윤호에게 성공적인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카이는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의 서랍장에서 서진이 보라고 일부러 넣어둔 사진과 반지를 꺼냈다. 사진을 엄지손가락을 쓸어내리며, 카이는 중얼거렸다. “유서린...”


이후, 숨겨둔 사진과 반지를 들고 밖으로 나와 저택 뒤편에 가려진 별관으로 들어갔다. 별관은 작지만 고급스러운 건물로, 메인 저택과 마찬가지로 검은 인테리어로 꾸며졌다. 카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현관문 키패드를 눌렀다.


덜컥-. 별관 안은 아주 싸늘한 공기와 함께 어두컴컴했다. 카이는 일부러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서린, 잘 지냈어?” 카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반대편 벽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 벽에는 스크린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에서 한 여자의 모습이 영상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카이는 그것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이-! 그만 찍고 빨리 오지?” 영상 속 여자가 카이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영상 속 카이는 “싫어-! 찍을 거야!”라고 답하며 여자를 쫓아갔다.


영상 속 둘은 웃음이 끊이지 않은 채로 저택 정원을 뛰어다녔다. 지금 카이와 서진이 지내는 이 저택의 정원을 말이다.


그렇게 모든 영상이 끝나고, 잠시 암전되었다.


“후우...” 카이는 깊게 한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안녕! 카이! 뭐야, 너 지금 앉아 있어? 일어나라니까!” 몇 초 뒤, 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카이가 반복 재생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의 불을 켰다. 그러자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유서린의 사진과 편지, 그리고 옷가지들이 보였다. 그는 방 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백윤호는 의외로 칠칠치 못해서 별관까지 점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망가졌던 그 둘의 추억을 다시 전시했다. 영상과 사진은 카이의 메모리칩에 저장되어 있던 파일들을 이용했고, 옷가지들은 실제 서린이 입던 브랜드와 똑같은 것으로 준비했다. 실제 서린이 입었던 옷들은 모두 불에 탔다. 그날의 화재로 모든 것이 불에 탔다. 카이의 기억만 빼고.


“난 네가 좋아. 우리 함께할 수 있을 거야!” 영상 속 서린은 계속해서 희망찬 소리를 했다.


“아니, 못 해.” 카이는 중얼거렸다.


“방법은 찾으면 되지! 우리 이거 끝나면 미국 갈까?” 카이의 무릎에 앉은 서린이 예쁘게 웃었다.


카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버린 서린에게 대답했다. “그래, 가자. 어디든.”




그 시각, 백윤호는 긴장한 채 회의실에 도착했다. 아직 본 회의 시작 30분 전이지만 중요한 중간 회의인 만큼 준비할 것이 많았다.


“현재 LOVER-7 프로젝트는 절반 정도 진행되었고, 담당자가 연인 단계까지 무사히 완수했다고 합니다.” 백윤호는 텅 빈 회의실에서 중얼거렸다. 조금 있으면 임원들이 곧 회의실로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성난 눈을 하며 질문을 쏟아내겠지.


3년 전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임원들이 이번 프로젝트에도 똑같이 배정되었다. 한때 우리 회사를 빛나게 해 줄 3년 전의 프로젝트를,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그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3년 전 그날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처음 입사해서 단기간에 능력을 인정받고 회사의 존폐가 달린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땐 팀장이 아니라 일개 사원으로 이 자리에 참여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자신이 총책임자가 되어 지금 이 앞에 있다. 그러자 새삼 감개무량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무조건 성공해야 해.’ 그리고 풀린 눈을 누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기억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백윤호, 유서린 씨. 잠시 나 좀 보지.” 신입사원 시절, 팀장님 호출에 회의실로 불려갔다. 유서린은 백윤호의 입사 동기로 둘 다 처음부터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화려한 스펙과 성실함, 그리고 추진력까지. 백윤호와 유서린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유서린과 백윤호를 서로를 쳐다보았다. 대학 동기인 두 사람은 친한 동료이자 선후배 사이였다.


“뭔 일이래?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유서린이 작게 속사였다.


백윤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따로 불릴 일이 없는데.”


팀장이 회의실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너네 큰 건 좀 맡아야겠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팀장은 둘의 대학 선배였다.


“우리 계열사가 회사 내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큰 기회야. 너네 연애 로봇이라고 아냐?”


둘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회사에서 오래전부터 사람 대 사람 말고, 사람 대 로봇 매칭 프로그램을 개발해 왔던 모양이야. 이제 연구가 마무리 단계까지 진행됐는데, 아무래도 이게 시장에 나오면 파장이... 좀 크지 않겠냐.” 팀장을 커피를 홀짝 마신 후 계속했다.


“나도 첨 들어본다. 대로봇시대라고 해도, 아직까지는 가정용 로봇이나 의료용 로봇, 서빙용 로봇이 익숙하지, 실제 사람이랑 연애할 수 있는 로봇은, 생소하더라고. 아무튼. 요새 저출산이다 뭐다 갈수록 인구수도 줄고 결혼하는 사람도 없고. 이러다 우리 계열사 망할까 봐 아저씨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래서, 이번에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봐. 이제는 진짜 연애 로봇을 출시해야 할 때가 왔다나. 우리가 이 연애 로봇 시장의 문을 열자나 뭐라나. 그래서 위에서 팀 짜라고 연락이 왔어. 여성용 하나랑, 남성용 하나. 이렇게 총 2개 상용화 시범 테스트 거치고,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출시 계획 짠다고.”


팀장은 팔짱을 끼더니 한마디 했다. “결론은. 연애해라, 로봇이랑.”


유서린은 입을 쩍 벌렸고, 백윤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선배!” 유서린이 꽥 소리를 질렀다.


“알아, 안다고. 근데 회사 기밀이라 외부 사람을 쓸 수가 없어. 지금 주 타겟층이 이삼십대 여성, 남성인데, 나는 마흔이 넘었고. 신입 중에서 믿을 만한 애들이 너네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 입사한 지 반 년 됐어요. 그렇게 중요한 일을 우리가 하는 건 좀... 회사 입장에서도 리스크가 크잖아요?” 가만히 있던 백윤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 근데 인재가 없어. 알잖아. 우리 회사 10년 만에 신입 뽑은 거. 다 팀장, 과장급들이라 나이대도 안 맞고. 연애, 그것도 골치고. 그것도 로봇이랑. 뭐 하는 짓이냐, 그게.”


‘본인들이 기획해놓고 별로라고 그러면 뭐 어쩌자는 거야.’ 백윤호는 속으로 짜증을 냈다.


“아무튼, 일주일 뒤 시작이니까, 그전까지 준비해라. 윤호는 출장 처리하고, 너는 휴가 처리해줄 테니까.” 팀장이 말했다.


“아-, 내 휴가.” 유서린이 불평했다.


“대신 인센티브 겁나게 받잖아. 이거 성공하면 너네 승진도 확정이고.” 팀장이 달랬다.


“뭐, 그건 좋네요.” 야망 있던 신입 시절의 백윤호는 당황스럽긴 했지만 받아들였다.


“아니, 그래서. 뭘 알고 가야 연애를 하든, 테스트를 하든가 하죠. 그 로봇 이름이 뭐라고요?” 유서린이 물었다.


“LOVER 7, 시리얼 넘버 KAI- 071, 카이.”


“카이.” 백윤호는 회상과 함께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저 멀리서 임원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내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회의실 문 앞에 서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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