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0

3장

by Nchips

'첫날부터 키스라니..'

서진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서진은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제 충동적으로 카이에게 입을 맞춘 것이 생각나 얼굴을 붉혔다. 카이의 입술은 따뜻했다. 그 감촉은 절대 로봇을 연상시키지 않았다. 서진은 그 순간의 설렘과 쾌락을 되뇌었다. 눈을 감으면 수줍게 마주한 그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열정적이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그의 눈빛. 서진은 생각했다. 이 정도면 정말 혁신이라고.


'더 테스트할 필요도 없어. 저건 로봇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야. 인간의 장기가 그저 기계로 대체된, 똑같은 존재라고.'


서진은 스탠드 옆 서류가방에서 체크리스트를 주섬주섬 꺼냈다. 유의사항과 단계별 테스트, 그리고 점수 기입란을 하나씩 채웠다.


'백윤호는 뭐 하려나...' 서진은 문득 딴생각에 빠졌다. 방금 전까지 카이와의 황홀한 입맞춤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백윤호를 떠올렸다. 그녀는 가만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백윤호의 갈색 눈동자를 어제 카이와 그랬던 것처럼, 정말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미쳤어!!" 그녀는 퍼뜩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진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카이는 분명 인간과 99.9% 비슷하다. 하지만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카이를 100% 인간인 백윤호의 대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헝클이며, 다시 펜을 들었다. '역시, 마지막 1%는 역부족인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비고란에 '만들어진 존재와 태어난 존재의 차이가 메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미래의 예비유저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관건은 이 차이를 어떻게 잘 포장하느냐의 문제.'라고 썼다.


하지만 이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문장이 아직까지 매니저로서 프로의식이 남아있다는 증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며 피식 웃었다. 메워지지 않는 1%의 존재에게 자신이 끌리고 있었으니까. 카이와 백윤호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지만, 그녀는 이 혼란이 좋았다. 두 남자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과 도파민은 오랜만에 전율을 가져왔다.


프로젝트는 총 한 달. 30일. 그동안 카이와 좋은 추억을 쌓고 마무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건 프로젝트가 아니라 거의 포상 휴가에 버금간다. 매력적인 남자, 아니 연애용 로봇과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이 최고의 인센티브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철컥-. 망상의 순간, 카이가 브런치가 담긴 접시와 블랙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잘 잤어?” 카이는 접시와 컵을 탁자에 올려두고, 침대로 뛰어들어 내게 안겼다.


“뭐야, 간지러-!” 서진은 카이와 침대를 뒹굴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너 요리했어, 카이?” 장난을 마무리하자 그녀의 시선은 음식으로 향했다.


먹음직스러운 에그 베네딕트와 코를 찌르는 블랙커피의 향. 접시는 장미 넝쿨이 그려진 아름다운 도자기였고, 컵은 그녀가 좋아하는 그린이다. 옅은 파스텔톤의 초록색.


서진이 요리를 구경하는 동안, 카이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검고, 빠져들 것 같았으며, 어딘가 아련했다. 그러다 곧 무언가를 떠올리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지웠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서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이 로맨틱하고 환상 가득한 느낌에 푹 빠져 있었다. 마치 로맨스 소설에 빙의라도 된 것처럼.


“있어 봐, 잘라줄게.” 카이는 능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했다. 단지 빵을 자를 뿐인데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자들이 한 번쯤은 꿈꿀 법한 그런 섬세하고도 자상한 남자. 심지어 잘생긴. 서진은 정말 그에게 푹 빠져버렸다. 첫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엄마가 종종 그녀에게 얼굴만 보지 말고 제발 다른 것도 좀 봐라, 그리고 오래 겪어봐라, 잔소리했지만 이 순간 그녀는 엄마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했다.


“뭐야, 맛있겠다.” 정성스럽게 잘린 빵 조각을 건네는 카이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느끼하거나 억지스럽지 않아 더 매력적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가 이 미소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는지. 그들은 목적은 항상 그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을 테지. 하지만 이렇듯 담백하면서도 청초한 미소를 그 누가 낼 수 있겠는가!


그 모습에 서진도 자연스레 애교를 담아 콧소리를 내었다. 맛있다는 발음이 계속해서 뭉개져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실 지금은 사실 전달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정체 모를 소리를 내며 정신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카이는 곧 커피까지 손수 건네주며 서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낮은 목소리와 적당한 호흡으로 이 여자의 모든 감각을 뺏었다.

서진이 이제 그만 샤워를 해야겠다고 말했을 땐, 정확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눈에 장난스러움을 담아 씨익 웃은 후, 서진을 번쩍 들어 놀래키는 것이다. 그럼 다음 서진은 이렇게 반응하겠지.


“꺄악-, 뭐야! 풉!” 작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힌 후 깔깔대며 웃는다. 이것이 로맨스 영화였다면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이겠지.


달칵. 그렇게 여느 연인처럼 연기한 후, 카이는 작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귀를 기울이며 서진의 행동을 주시했다.

이윽고 샤워기가 작동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카이는 접시를 치우고 그 아래 깔린 서진의 서류를 펼쳤다.

“만들어진 존재와 태어난 존재의 차이가 메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미래의 예비유저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카이는 서진이 쓴 글을 중얼거렸다.

“만들어진 존재...” 그는 차가운 눈동자로 한 번 더 그 부분만 읽었다. 그리곤 화를 식히려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멍청하긴, 쯧.”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서진이 눈치채지 못하게 서류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 위에 처음 그대로 접시까지 올린 후,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 “서진! 나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설거지 좀 하려고. 천천히 내려와! 그리고 저택 구경시켜 줄게!”

알겠다는 서진의 대답을 듣고 카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웩-, 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이내 싱긋 웃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서진은 그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샴푸로 머리를 적셨다. “와, 오늘 정말 기분 최고야!”


그 시각, 백윤호는 외근을 나와 있었다. 파트너사와 비즈니스 미팅을 마친 후 한숨 돌리던 참이었다. 단골 가게에서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하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 오늘은 워커홀릭 그답지 않게 반차를 쓴 날이다. 백윤호는 사실 웬만하면 결근이나 조퇴를 하지 않는다. 그건 예전부터 그랬다.

학창 시절에도 그는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은 항상 그를 ‘우리 사윗감’이라고 불렀다. 훤칠한 외모와 철저한 관리. 시크한 표정으로 특유의 분위기를 내는 백윤호는 학생 같지 않았다. 어른보다 더 성숙할 정도였다.

“너도 윤호 오빠 반만 닮아봐라.” 서진은 학창 시절 내내 그 소리를 들었다. 전형적인 엄친아 타입에게 매일 비교당하는 왈가닥 딸이랄까. 그래서일까. 서진은 백윤호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싫어했다. 가족 행사마다 성적, 외모 등을 비교당하는 것은 일상이고, 자신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차가운 눈빛으로 팩트를 짚어주는 것도 짜증이 났다.

‘진짜 재수탱. 완전 지 잘난 맛에 살어.’ 당시 서진은 백윤호가 감정도 없고 인간미도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하지만 간간이 보여지는 백윤호의 무심한 배려에 설렐 때가 더 많았다.


“너 대학 떨어졌다며?” 수능을 망쳐버린 어느 날.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아파트 앞 놀이터에 숨죽이며 울고 있었을 때. 서진이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백윤호는 그 옆을 지켰다. 무심하게 서진이 좋아하는 초코우유를 건네며.


“...빨대는?” 서진의 대답에 백윤호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주머니에서 빨대를 꺼냈다. 회색 후드티 소매로 눈물자국을 문지른 서진은 삐죽거리며 우유를 마셨다.


“크하-!!”


“뭐, 소주 마시냐?”


“나 재수하래.”


“....”


“하기 싫다. 공부 드럽게 재미없는데.”


“해.”


“재미없다니까.”


“해. 나랑 같은 대학 가. 오면 밥 사줌.”


서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백윤호를 쳐다보았다.

“뭐야, 이거 설마 위로야?”


“...아니거든. 우유나 먹어.”


“야-!! 백윤호!! 미쳤다! 뭐야. 웬일?”


“아-, 시끄럽다고, 좀.” 괜히 짜증을 부렸지만, 백윤호의 귀는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차암나-! 그래! 니가 원하다면 뭐! 까짓것 하지, 재수!” 서진은 백윤호를 놀리며 실컷 웃어버렸다. 그날 저녁의 공기는 꽤 차가웠지만 두 사람의 웃음소리 안에서 새로운 열기로 바뀌었다. 둘은 그런 관계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다시 현재. 백윤호는 갑자기 떠오른 옛날 생각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문득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수정 씨. 윤서진 매니저한테 뭐 연락 온 거 있어요?”


“네, 팀장님. 아뇨. 아직까진 없는데요. 이틀밖에 안 지났다 보니...”


“연락오면 바로 저한테 말해줘요. 재부팅해서 이전 기억은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정말 괜찮겠죠?”


백윤호는 잠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숨을 가다듬은 후,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럼요.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통화를 마친 후, 백윤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았다. 3년 전 자신을 노려보던 검은 눈동자가 생각났다. 아무 감정도 없이 중얼거리던 그 모습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애써 말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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