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5

4장

by Nchips

“일어났어?” 카이는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는 서진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들고 왔던 서류를 살펴보던 서진은 이내 그것을 덮었다.


그동안 둘은 완전한 연인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서로의 품에서 자고 깨어나는 일을 반복했다. 매일매일 같이 요리하며 행복을 속삭였다. 황홀한 나날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한 적 없던 서진은 처음으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자신의 환경을 불평한 적 없었다. 백윤호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서진은 절대 고백할 수 없었다. 자신이 고백한다면, 이 가벼운 관계도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한 것도 백윤호 때문이었다. 엄마 병원비는 핑계였다. 그게 최우선순위는 아니었다. 백윤호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자신에게 백윤호는 완벽한 상대였다. 하지만 동시에 열등감의 대상이었다. 평생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질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를 완전히 갖고 싶다는 마음. 그래서 서진은 자신을 혐오했다. 이 복잡하고도 추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뭐할까?” 둘은 침대에서 나오지 않은 채 물었다. 서진의 머릿속과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은 카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영화 볼까? 저번에 보다 말았던 거.”

“뭐야, 그거 너 때문이잖아! 그렇게 자 버리고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둘은 정말 평범한 연인 같았다. 사소한 하루를 같이 보내는 그런 편안하고 설레는 관계. 카이는 안전했다. 완전히 서진만을 위해 존재했다.

띠리링-. 오랜만에 백윤호에게 전화가 왔다.


“잠깐 전화 좀.”


그녀는 싱긋 웃으며 카이의 품에서 나와 밖으로 향했다. 나가면서 카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언뜻 들었지만, 너무 작아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전화를 받았다.

“응, 오빠.”


“윤서진. 지금이 며칠 째지? 15일 째인가.”

안부도 없이 본론부터 들이미는 것이 정말 백윤호 다웠다. 서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넘버 KAI- 071는, 어때?”


“뭐가 어때. 잘 지내고 있지.” 서진이 제법 틱틱댔다.

“장난하지 말고. 어디까지 진행됐어. 연인 단계야?”

“그래. 서류에 적힌 단계 중에서 연인 단계까지 진행됐어. 거의 마지막 단계야. 15일 만에 그게 실현이 됐다고. 너무 자연스럽고 인간이랑 비슷해서 로봇인 줄 전혀 모르겠어. 프로젝트 성공한 것 같은데?”

백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빠. 카이, 시범로봇이지? 그럼 어차피 나한테 맞게 설정한 거니까, 프로젝트 끝나도 내가 계속 가지면 안 될까?”


백윤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서진은 정말로 카이를 가지고 싶었다. 그 로봇과 있으면 마음의 진정이 되었다. 다시 현실로 나가면 지옥일 텐데, 카이가 있으면 평생 나를 지지해줄 사람, 아니 로봇은 하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서진에게는 정신적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다. 어차피 백윤호에게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어차피 폐기시킬 거 잖아. 런칭 서비스 매뉴얼에도 그렇게 써 있던데? 세계에서 단 하나만 존재하는 이상형 로봇일 거라고. 재활용 안 할 거라고. 그럼 카이도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안 줄 거잖아. 맞지?”

“윤서진.” 백윤호가 갑자기 무서운 목소리로 서진을 불렀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들어. 걘 인간이 아니야. 로봇일 뿐이라고. 네가 할 일은 남은 15일 동안 무사히 단계를 완수하는 것. 그뿐이야. 사사로운 감정에 빠질 때가 아니라고.”

서진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그냥 물어본 거잖아. 아, 어차피 버릴 건데, 좀 주는 게 어때서?”

백윤호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조용히 설명했다.

“우리가 왜 널 그 프로젝트에 보낸 줄 알아? 그렇게 완벽한 성능의 로봇이었다면 이 프로젝트 할 필요도 없었어. LOVER-7 시리즈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 우린 지금 그걸 해결하지 못한 상태고. 기존 프로젝트 때 희생당한 사람도 있어. 지금은 많이 보완되긴 했지만.”

서진이 말을 끼어들 틈도 없이, 백윤호는 계속 이어갔다.

“포인트는 이거야. 끝까지. 십 오일 뒤에 헤어짐까지 완벽하게 수행해줘. 명심해. 마지막 단계는 이별이야. 반드시 이별까지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해.”


“뭐, 알았어. 근데, 아까 그건 무슨 말이야? 희생당했다는 게…”

“서진!” 등 뒤에서 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꺄악-!” 서진은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카이는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주어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서진에게 건넸다.

“무슨 전화야?” 그는 싱긋 웃었다.


서진은 조금 당황하며 휴대폰을 받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뒤에 있었던 건지.

“아, 그냥 팀장님 전화. 그...백윤호 팀장이라고-,”


“아-, 백윤호 팀장님?”


"뭐야? 너, 백윤호 팀장님 알아?"


"응-, 알지?"


"뭐? 네가 어떻게-."


"방금 네가 얘기했잖아. 백윤호 팀장이라고. 바보야-." 카이는 장난스럽게 서진의 머리를 가볍게 만졌다.

"뭐야...하하. 그랬나?"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흘러 서진은 그만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카이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가자,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은 가보다. 우리 영화 봐야지.”

서진은 살짝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떨쳐냈다. 아무튼 짜증 나게 하는 백윤호였다. 머리 아프게 생각하기 싫었다. 여전히 자신에게 쌀쌀맞은 백윤호가 미웠다.

“그래, 영화나 보자. 아, 내가 아래층에서 과자 챙겨 갈게. 넌 위에서 세팅 좀 해줘!”

둘은 곧 각각 아래층, 위층으로 향했다. 서진은 과자를 챙기다 말고, 아까 백윤호와의 통화를 곱씹었다.


‘이별까지 잘 완수하라고? 이별까지..?’


솔직히 이 프로젝트는 자신에게 덤 같은 개념이었다. 인센티브 겸 휴가 같은. 그래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는데,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모르겠다.”


백윤호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지만, 서진은 일단 아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15일밖에 남지 않았다. 마무리까지 잘하면, 엄마 병원비도 해결되고 자신도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 카이를 넘겨받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했다.


주방에서 과자를 찾아 헤매던 서진은 우여곡절 끝에 천장을 열었다.


“찾았다-.”


서진이 과자를 꺼내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무언가 반짝였다. 꽤 깊은 곳에 들어가 있었기에,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손을 뻗었다. 딱딱한 물체였다. 손을 펴보니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보였다.

“웬 반지가..?”


다시 천장 안을 살펴보니 사진 한 장이 과자 밑에 깔려 있었다.

“백윤호랑 카이잖아…?”


사진 속에는 백윤호와 카이, 그리고 어떤 여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배경은 코너의 연구소 앞. 플랜카드에는 ‘LOVER -7, 첫 프로젝트 성공 기념’이라고 쓰여 있었다. 서진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백윤호가 말하길, 카이는 몇 달 전에 새롭게 만들어진 로봇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날짜는 벌써 3년 전이었다.

“그냥 복제품인가? 똑같은 로봇은 아니겠지?”

서진은 머리가 복잡했다. 무언가 탁 막힌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갑자기 이 프로젝트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사실 두 사람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솟았다. 자신을 속이고 무언가를 실험하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아까 통화할 때도 그랬다. 카이는 분명 백윤호를 알고 있었다.

‘아까도 좀 이상했어. 분명 카이가 백윤호를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로 말했잖아. 뭐야, 그럼 카이는 몇 달 전에 만들어진 로봇이 아니라 3년 전에 만들어진 로봇이라는 건가? 말이 안 되는데... 백윤호가 나한테 거짓말한 건가? 그럼 카이는?'

서진이 약간의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위층에서 카이가 소리를 질렀다. “뭐해-! 얼른 와! 영화 시작한다-!”

“어어-!! 이제 가-! 잠깐만!” 서진은 화들짝 놀라며 일단 반지를 원래대로 두었다. 대신 휴대폰으로 사진과 반지를 찍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일부러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은 직감이었다. 백윤호와 카이가 서로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아까 백윤호와의 통화에서 희생당했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 분명, 이 프로젝트에는 서진이 모르는 비밀 같은 것이 있다.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서진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15일이다. 15일 뒤, 자신은 예상대로 이 대형 프로젝트를 끝내고 승진과 함께 유유히 이 저택을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그치만... 뭔가 있어.’ 서진은 양쪽에 과자를 한가득 들고 왔기에 발로 방문을 찼다. 그러자 카이가 해맑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서진도 그것에 응답하며 침대에 풀썩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곧 두 사람은 유쾌하고 달콤한 분위기에서 서로에게 귓속말과 키스를 퍼부었다.

서진은 일단 이 기분을 여전히 만끽하기로 했다. 하지만 동시에 카이와 백윤호의 관계를 주시하기로 했다. 아까 본 반지와 사진의 존재는 분명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3년 전, 카이와 백윤호, 그리고 그 사진 속의 여자의 관계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서진은 알아야 했다. 불길한 기운이 자신을 감쌌다. 하지만 곧 기우일 뿐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는 저 눈동자가 어딘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저것은 인간인 척하는 로봇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회사 직원일 뿐이다. 곧 이 환상이 끝난다. 서진은 남은 시간 동안 카이와 뜨거운 연애를 할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낼 것이다.


‘대체 뭐야, 이 불길한 느낌은.’ 서진은 탄산음료를 마시며 카이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이도 서진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화, 목 연재
이전 03화D-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