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국기
지난 9.12 유엔기념공원 소위원회 회의가 해운대 한 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돼 이곳에 안장된 14개 국가 중 11개국 참전용사들(2333명)의 모국 주한 대사관 무관 또는 차석 회의다. 1년에 두 번, 4월과 9월에 개최된다.
이 회의는 매년 10.24 유엔의 날 계기 개최되는 대사 회의의 준비 회의 성격이다. 이곳에 작년 10월 부임한 이후 2차례 회의에 참석했는데 소위원회 회의가 통상 다자회의에서 문서로 쓰인 발언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의제별로 열띤 토론이 오고 가는 형식이다.
이번에도 여러 이슈가 있으나, 튀르키예 대표가 자국 국기에 관한 시정요구다. 유엔기념공원 상징구역과 참전용사비 근처에 있는 24개 국기(유엔기, 전투병 파견 16개국, 비전투병 파견 6개국, 태극기)가 1년 내내 펄럭인다. 비바람에 바래진 국기는 2개월마다 교체된다. 그간 교체된 국기는 소각했으나 내가 부임 이후 그 국기를 상자에 넣어 주요 인사 방문 시 선물로 주었다. 자국 참전용사들과 2개월을 함께 지낸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자 한 튀르키예 참전용사 후손은 평생 '가보'처럼 보관하겠다고까지 했다.
유엔기념공원은 튀르키예인들이 반드시 찾아오는 성지다. 튀르키예 참배객 일부가 자기 국기의 뒷면이 흐릿하다고 개선을 요청하는 민원이 있었고, 이번 회의 시 튀르키예 대표가 제기를 했다.
그간 하루 2번씩 유엔기념공원을 둘러보았어도 국기 앞뒤가 다른 것을 눈여겨보지 못했었다. 이번 회의 후 다시 상징구역에 휘날리는 튀르키예 국기를 보니 확연히 뒷면이 뿌엿게 보였다. 유엔기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국기들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자세히 보면 앞쪽은 찐하고 뒷쪽은 약간 흐리다. 햇빛이 있어 사진엔 선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자초지종을 직원에게 물어보니 5년 전까지 미국 전문업체에 맡겨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단가가 높아 국내업체에 발주해 사용하는 바람에 국기 뒷면이 뿌엿게 나온다고 한다. 수입품을 사용하려면 현재 국기 구매비의 3배가 넘는다고 한다. 대전 한국업체도 있지만 1년 3백 개(각 국기당 12개, 2개월마다 교체 기준) 정도밖에 안돼 규모의 경제 효가가 없어 단가가 안 맞는다고 한다. 당장 튀르키예와 유엔기만이라도 양면 인쇄를 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자고 했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부산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최를 준비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여러 의전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아세안 10개국 국기를 똑바로 만들고 똑바로 게양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회의가 가까워졌을 때 한 직원을 국기 담당으로 지정해 옥내, 옥외 및 각종 인쇄물에 국기를 점검하도록 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만찬 대기실 한쪽 켠에 있던 한 국기가 아래위로 바뀐 것을 나중에 발견했을 정도다.
올해 10.31~11.1간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정상회의 홍보에 보면 그 어디에도 회원국 국기가 안 보인다. 21개 회원국에 중국과 대만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고, 대만을 중국 지방 정부로 보고, 미국도 하나의 중국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물론 대만은 엄연히 국기가 있는 독립국가다. APEC '정상회의(Summit meeting)'는 편의상 부르는 것이고 정식명칭은 APEC '지도자회의(Leaders' meeting)다. 중국과 대만 때문이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가 개최된 동백섬 누리 마루가 올해 경주 APEaC 정상회의 때문에 혹시 야간 조명을 켜 놓았나 모르겠다. 저멀리 광안대교가 보인다.
우리 언론에도 국기가 잘못 걸리면 행사 성공 여부를 떠나 뭇매를 맞는다. 이처럼 민감한 게 국기인데 그간 더 주의 깊게 보지 못해 자책감이 든다.
조속히 앞뒤가 같은 튀르키예 국기가 상징구역에 휘날리도록 하려고 한다. 가을 초입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유엔기념공원 상징구역 국기봉 끝자락에서 24개의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