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외교

어둠 속에서 발견한 지방의 얼굴들

by 동남아 사랑꾼

청주 외곽의 한 호텔에 도착한 것은 초저녁이었다.

부산역에서 KTX로 두 시간, 다시 오송역에서 택시를 타고 30여 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도착하고 나니 어쩐지 먼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송에서 청주 방향은 세종청사를 등지고 달리는 길이다.

논두렁 사이를 가르며 난 도로를 따라 택시는 묵묵히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창밖은 깜박이는 불빛 하나 없이 칠흑 같고,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희미하게 점점이 박혀 있었다.


택시 기사는 터널 하나를 지나며 조용히 말했다.

“여기가… 2년 전 오송 참사 현장입니다.”


공사 때문에 도로를 막아둔 사이, 불어난 물이 터널 안으로 밀려 들어와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터널 벽에 파이프 하나 달아놨다더군요. 홍수 나면 그걸 잡고 나오라고… 그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사의 한숨은 어둠보다 무거웠다.


문득 며칠 전 뉴스를 뒤덮었던 홍콩의 초고층 아파트 화재가 떠올랐다.

창밖에 보이는 우리 아파트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은 전국이 아파트로 덮인 나라다.

과연 우리는 안전한가—

여행길에 떠오르기엔 조금 과하디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청주에 도착해 보니, KTX 역과의 연결성도 좋지 않고, 가까운 역에서도 2만 5천 원을 내고 택시를 타야 하는 구조였다. 대규모 회의나 포럼이 열리기엔 여러모로 쉽지 않은 조건.


호텔은 가격 대비 깔끔했지만, 특이하게도 프런트가 1층이 아닌 21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통유리 너머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불빛. 요즘 동남아 고급 호텔들이 이런 구조를 많이 택하곤 하는데, 그 분위기를 따라 한 듯했다.

하지만 한쪽 벽에 등을 기대듯 놓여 있는 싸구려 소파는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앉으려다 말았다.


저녁을 먹으러 호텔 밖으로 나왔더니 주변 건물들도 급히 지어진 티가 났다.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온갖 스웨디시 마사지 간판이 거리를 메웠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고—

어정쩡한 지방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 풍경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걸까.”


가볍게 흘려본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지방의 위기라는 커다란 흐름이 이런 미세한 일상의 불편 속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출산·고령화 시대, 지방은 가장 먼저 인구 소멸의 벼랑에 내몰리고 있다.

그런 곳에서 나는 지방외교 포럼에 참석하러 온 것이다.


현직 시절, 지방자치단체들이 벌이던 지방외교의 현장을 많이 봐왔다.

자매도시 방문, 일회성 행사, 국제포럼 경쟁.

외교적 전략보다는 방문 실적이 앞세워지고, 해외 공관과의 연계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번 포럼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처럼 들릴지 몰라도, 지방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말을, 조금 다른 언어로 써본다면 이렇다.


글로칼리즘(Glocalism)을 향하여 — 지방이 세계를 만나는 법


오랜 시간 중앙 외교의 한복판에서 일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외교의 수요도 더 촘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중앙정부만의 외교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탈세계화와 공급망 재편


다자주의의 약화


미·중 디커플링


기후위기와 디지털 전환


민주주의의 후퇴


이 복합위기 속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는 곳곳의 지방이다.


산업도, 일자리도, 인구도, 미래도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지방은 스스로 세계를 만나야 한다.

외교가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서.


하지만 현실의 지방외교는 여전히 이벤트 중심이고, 자율성은 낮으며, 외국 공관과의 접점도 미약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역의 문제’를 ‘외교의 언어’로 번역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1. 중앙과 지방의 외교를 잇는 ‘제도’ 만들기


지방이 세계를 만나려면,

의지뿐 아니라 근거와 권한이 필요하다.


지방 외교 자문대사 제도 확대


지방 공무원의 해외 공관 파견의 실질화


지방외교 기본법(가칭) 논의


중앙과 지방이 서로의 외교를 지탱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2. 지역의 힘을 세계와 잇는 ‘글로칼 플랫폼’ 만들기


도시는 혼자가 아니다.

지자체·대학·로컬 기업·문화기관·전문가가 함께 지역의 글로벌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 글로벌 협력 플랫폼 구축


지방 글로칼 연구소 설립


지역 외교의 지속가능한 생태계 만들기


외교는 개인이 아니라 지역 전체가 해야 한다.


3. 지자체장의 외교 자문단 — 전문성의 제도화


지방외교의 성공은 결국 사람의 문제다.

전문가 자문단이 있고,

정기 포럼이 있고,

해외 도시를 꾸준히 벤치마킹해야 한다.


다문화 사회의 정착, 기후 변화 대응, 산업 전환 같은 지역 문제를 외교로 풀어내는 시도가 필요하다.


맺으며 — 지방은 이미 세계의 일부다


우리 지방도시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세계와 연결되고 있다. 다만, 그 연결을 제도적·지속적으로 만드는 작업이 아직 부족할 뿐이다.


밤길의 터널을 지나며 만났던 어둠,

호텔 21층에서 내려다본 청주의 불빛,

불편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그 풍경들.


그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생각을 다시 붙잡았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

이제는 이 말이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지방의 생존을 위한 실천이 되어야 한다.


지방의 작은 선택이,

어쩌면 한국의 미래 외교를 바꾸는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도시포럼 토론에 참석해 보니 발제자가 상기 준비한 내용을 많이 언급했고, 다른 토론자들도 유사한 요지로 이야기를 해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1. 이번 도시외교 포럼의 주제와 가장 맞는 경구는

"Think globally, Act locally"라고 본다며, 도시외교가 글로칼리즘(Glocalism)을 지향해야 한다.


2. 도시외교 포럼의 전략적 공간은 중앙 정부의 외교가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다루기 어려운 국가나 이슈를 다루는 데 있다.


5년째 쿠데타 정국인 미얀마는 한국을 포함해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와중에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의 대미얀마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미얀마의 잠재력 감안, 지방 정부의 도시 외교 공간이 있다.


중국이 사드 이후 혐한령과 한국 중앙정부와의 접촉을 제한하고 있으나, 지방 정부와의 협력은 계속 이어가길 바라고 있고, 실제 그러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와와도 마찬가지다.

중앙 정부가 이러한 국가와의 접촉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방정부가 조용히 역할을 할 수 있다.

도시외교도 양자보단 NEAR 등 다자지방외교채널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촉하면 효과적일지 싶다.


또한 인구소멸, 지방소멸로 인해 대학의 신입생 충원 및 산업인력이 외국인들로 채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주민 밀착형 이슈들에 대해 도시외교가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다.


3. 이러한 미얀마, 중국 및 러시아 협력을 지방 도시외교가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방 외교 인프라 구축이 중요하다.


18개 광역시 파견 국제자문대사를 실질적 권한을 주고 잘 활용하고, 지방 특상에 맞는 글로칼 연구소 맟 지방외교 자문단을 신설•운영을 제안한다.


4. 도시포럼 종료 후 발표된 "중원 선언"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도시외교를 위해 공진(co-evolution)을 강조하는데 공감이 간다. 키신저가 그의 책 "중국이야기(On China)"에서 미중 간 공진을 제안한 지혜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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