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la Bay가 품은 나의 기억들
12.5 필리핀에 한·아세안 포럼 참석차 왔다.
마닐라의 이맘때 날씨는 참 좋다. 11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건기 특유의 선선한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바틱 긴팔을 꺼내 입게 만든다.
새벽 공기마저 온화하지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닐라 베이의 어둠을 바라본다.
이른 새벽의 마닐라 베이 마닐라 베이 석양
시차 때문일까, 종일 포럼에서 머리를 곧게 세우고 듣던 탓일까.
아니면 오랜 현직 시절 함께 일하던 인연들—엘리자벳 전 필리핀 대사, 그리고 Abad 전 아세안사무국 ARF Unit 담당자—를 다시 만난 탓일 지도 모른다.
특히 Abad.
1993년부터 15년간 아세안사무국 요직을 거쳐 10년간 필리핀 전략개발연구원 소장을 지낸 그는 내가 아세안에서 일하던 시절 가장 성실하고 따뜻한 정책가였다..그가 내게 친필 서명해 주었던 그의 책, 『The Philippines in ASEAN』.
나는 이번 포럼을 앞두고 그 책을 다시 정독했다.. 아세안 각국이 왜 아세안에 들어왔고,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를 ‘아세안의 눈’으로 들여다보게 해 준 소중한 책이다. 그가 지금 그 책의 개정판을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나까지 설렜다.
Manila Bay가 품은 오래된 장면들
40년 넘은 아드미럴 호텔.
그 창문 너머로 새벽어둠을 뚫고 요트의 불빛이 반짝인다. 이 풍경은 나를 자연스레 ‘그때의 마닐라’로 데려간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마닐라에 왔을 때, 나는 마닐라 호텔에서 밤새워 회의 준비를 했다.
‘동아시아 협력에 관한 마닐라 선언’이 채택되는 순간을 지켜보았고, 당시 탄쉐 미얀마 장군과의 회담 준비를 맡아 긴박하게 움직였다.
그 새벽도 지금처럼 어두웠다.
Manila Bay 위에 아침이 열리기 직전의 저 고요한 어둠.
2007년 세부 한·아세안 정상회의도 떠오른다.
당시 외교부 동남아 과장이던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왔고, 회의 아침 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관께서 묻습니다. 노 대통령의 마지막 아세안 정상회의인데, 아세안에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 없겠습니까?”. 나는 10여 년간 아세안의 요청받아왔던 ‘아세안무역진흥센터’ 아이디어를 건의했고, 대통령은 이를 회의장에서 직접 제안했다.
그 결정은 2009년 ‘한·아세안센터’로 탄생했고, 지금은 협력의 대표 플랫폼이 되었다.
그리고 2017년. 아세안 50주년.
아세안 대사로서 문재인 대통령을 마닐라 회의에 모시고 왔던 그 해.
이렇게 나는 직업 외교관으로서 마닐라에 세 번, 양자 방문은 셀 수 없이 왔다. 은퇴 후에도 UN ESCAP 자문으로 두 번, 이번이 세 번째다.
여러 번 왔지만, 이번처럼 마음이 놓여 Manila Bay의 석양과 여명을 여유롭게 바라본 적은 없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 다시 묻는 질문
필리핀을 생각한다.
1960년대만 해도 일본 다음의 경제 강국. 우리는 장충체육관을 그들 손으로 지었다. 그러던 나라가 ‘아시아의 병자(sick man of Asia)’라는 말을 듣는 시절을 지나,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다.
‘VIP’—Vietnam, Indonesia, Philippines.
아세안에서 인구 1억이 넘는 세 나라.
내수 소비가 활발한 필리핀은 다시 성장의 활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마닐라의 현실은 복잡하다.
지금 마닐라 교통체증은 방콕, 자카르타보다도 심하다.
왜 이 시기만 되면 더 막히냐고 묻자, 현지 지인이 웃으며 말했다.
“9월부터 100일 동안 크리스마스 시즌이거든요. 행사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
“돈이요?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 가정부부터 엔지니어까지… 다 가족에게 보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1970년대 독일에 파견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보내온 해외 송금은 자녀 교육과 한국의 미래 성장의 씨앗이 되었다. 필리핀 노동자들의 송금이 GDP의 10%를 차지하지만, 보다 생산적 쓰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식민지의 긴 그림자—스페인 330년, 미국 48년 그리고 일본 점령 3년—그리고 소수 엘리트의 기득권 구조, 만연한 부패, 단절된 사회 이동성.
그 모든 것이 필리핀의 발목을 잡았다.
호텔 밖 마닐라 베이에 호화 요트가 가득하다.
밤새 불을 밝히는 모습이 어쩌면 크리스마스 파티의 예고편인지도 모르겠다.
2026년 아세안 의장국을 앞둔 필리핀에 기대를 걸며
내년이면 마닐라에서 아세안 정상회의가 다시 열린다.
필리핀은 1987년, 1999년, 2007년, 2017년에 이어 다섯 번째 의장국이다. 이 나라에 주어진 기회는 결코 작지 않다. 경제적 활력, 젊은 인구, 글로벌 노동력,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한번 도약하고 싶다”는 국민들의 열망.
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아세안 의장국이라는 무대 위에서 필리핀이 보여주길.
마닐라의 마지막 새벽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그런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