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토요일 봄날, 성지곡 수원지.
숲해설가 수업을 들으러 부산 어린이대공원 안쪽 숲으로 들어갔다.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니지만 겨울의 매서움은 한풀 꺾였고,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숲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이곳의 공기는 다른 시간대에 있는 듯 고요하다.
성지곡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락지에서 강사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잠시 몸을 쉬려고 배낭을 침대 삼아 바닥에 누웠다. 시선을 하늘로 올리자 높이 솟은 편백나무와 삼나무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아마 백 년은 족히 되었을 나무들이다.
그때 강의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크라운 샤이니스(Crown Shyness).
나무의 가지와 잎이 서로 닿지 않도록 미묘한 간격을 두며 자라는 현상을 말한다. 광합성에 꼭 필요한 햇볕을 나누어 가지려는 나무간의 배려다. 멀리서 보면 나무 꼭대기 사이에 마치 하늘의 퍼즐 조각처럼 빈 공간이 생긴다. 서로 경쟁하며 자라는 숲에서조차 나무들은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그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편백과 삼나무의 잎과 가지가 맞닿을 듯 말 듯 멈춰 있다. 마치 서로의 영역을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것처럼.
문득 생각이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우리는 같은 집단 속에서 살면서도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고 있을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상대의 영역을 쉽게 침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가족, 직장, 사회 어디에서나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선을 잊는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이웃의 공간을 밀어내기도 한다. 힘이 클수록 그 경계는 더 쉽게 무너진다. 요즘 국제정세를 보면 그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미국의 이란 공습을 둘러싼 긴장도 결국 국가의 힘과 이해가 서로의 경계를 밀어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숲의 나무들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지도 모른다.
백 년을 함께 서 있으면서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서로의 가지가 부딪히지 않도록 조금씩 비켜서며 함께 하늘을 향해 자란다.
숲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사람에게도, 국가에게도
나무의 지혜가 조금은 필요하지 않을까.
토요일 봄날, 성지곡 수원지 숲속에서
편백과 삼나무가 가르쳐 준 조용한 배려를 생각하며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