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상의 모습일까.
3월 마지막 주말, 해운대 동백섬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국가는 무엇으로 싸우는가(Chokepoints)』를 읽다가 잠시 책을 덮는다. 커피 머신이 내는 찌직거리는 소리, 손님들의 낮은 대화, 그리고 “몇 번 손님, 커피 준비되었습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잦은 파동처럼 공간을 채운다. 창문 너머로는 잔잔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소음과 정적이 한 장면 안에서 겹쳐진다.
책 속의 세계는 이 고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미국은 군대가 아니라 금융을 통해 싸운다. 이란에 대한 제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어진 금융 봉쇄, 중국을 겨냥한 기술과 공급망 통제까지—보이지 않는 손이 세계를 움직인다. 그런데 그 경제전쟁의 수단이 충분하지 않을 때, 다시 군사라는 오래된 방식이 고개를 든다.
한 달 전부터 이어진 중동의 긴장은 그 전환의 순간을 보여준다. 한달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옵션이 시행되면서 국제 유가는 단숨에 뛰었고, 주유소의 가격표도 함께 올라갔다. 각국은 비축유를 꺼내 들고, 한국에서는 차량 운행 제한까지 검토된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세계는 숫자로 반응하고, 사람들은 체감으로 받아들인다.
동시에 홍해에서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운다. 예멘 후티 반군의 공격 가능성, 유럽으로 향하던 유조선의 긴 항로, 그리고 그로 인해 길어지는 시간과 비용. 바다는 여전히 푸르지만, 그 위를 지나는 길은 점점 불안정해진다.
멀리 카리브해를 떠올린다. 쿠바의 하바나. 코로나 시절 몇 차례 방문했던 그 도시는 밤이면 원래도 어두웠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던 칠흑 같은 풍경이 아직도 눈에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둠이 더 짙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베네수엘라의 지원이 끊기고, 생필품 배급마저 줄어든 도시. 사람들은 하루를 버티듯 살아간다.
그곳에는 1천 여명의 한국계 쿠바인들도 있다. 수세대를 지나며 피는 희미해졌지만, 정서는 여전히 낯설지 않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던 묘한 연대감이 떠오른다. 지금 그들의 하루는 어떤 무게로 이어지고 있을까.
전쟁은 언제나 지도 위에서 시작되지만, 끝내 사람의 얼굴 위에 흔적을 남긴다. 우크라이나의 시민들, 이란의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수많은 이들이 그 흔적 속에 살아간다. 뉴스는 전선을 보여주지만, 삶은 그 뒤편에서 무너진다.
카페 안의 소음이 다시 또렷해진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전화를 받는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일상의 소리다. 그러나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는 그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힘이 법보다 앞서는 시대, 한 국가의 결정이 다른 수많은 삶을 흔드는 시대. 지금의 혼란을 우리는 ‘먼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너무 가벼운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먼지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이 먼지가 걷히고 시야가 다시 또렷해질 날이 올까.
그때가 되면, 지금 이 카페의 소음처럼 평범한 일상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다른 세계로 건너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