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해운대 일요일 아침, 초등학생 친구 부부가 1박 2일로 부산에 왔다. 시간으로 보면 24시간 정도여서 세게 부산 구경을 시켰다.
동백섬-해운대 아침~송도 해수욕장-유엔기념 공원-광안리 해수욕장-해운대 해변 야경 코스로 장장 3만 5 천보는 족히 넘는 거리다. 집에 오니 밤 10시다.
그들을 막 보내고 왼쪽 동백섬, 오른쪽 광안 대교, 정면 오륙도와 대마다가 보이는 모모스 커피숍에서 아메리카 한잔을 시켜 놓고 있다.
아침 9시에도 카페가 꽉 찼다. 1인석에 앉아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이리 바쁘게 보낸 하루가 내가 그간 직장에서 살아온 꽉 찬 일정의 삶과 그런 일정표를 보며 왠지 피곤하지만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던 여정이 불현듯 펼쳐진다.
사람관계도 일도 커뮤니케이션도 그렇게 꽉 찬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내온데 대한 아쉬움이 스며든다. 여백이 없는 삶이었다.
물론 의도하진 않았지만 사람 만나 사귈 때 핸디캡은 많이 주려고 노력은 했다.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핸디캡과 여백이다. 직원이 일을 해서 가져올 때도 직원 간 차이를 받아들이고 약간은 업무 성과가 떨어진 직원이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여백을 주긴 했다.
꽉 찬 일정에 익숙해진 내가 이제 여백 사고를 하는 중이다.
먼저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KTX 내 시간이 여백의 공간이고 시간이다. 일찍 퇴근해 집 근처에 홀로 산책하는 시간도 여백이고 여유고, 어둠이 깔리고 이른 잠자리를 청하는 신독의 시간도 여백이다.
새로운 부산 직장은 4만 평의 넓은 땅이 있는 유엔군 묘지다. 과거에는 묘들로 꽉 찬 곳이었는데 본국으로 묘를 이장해 가 여기저기 빈 공간이 많다.
꽉 찬 공간과 시간 속에 익숙한 나는 이 텅 빈 공간이 왠지 낯설다. 그래서 숲도 만들고 조형물도 만들려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 띵하며 깨닫게 된다. 과거의 내 모습의 소환이다.
외국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하는 그들이 빈 공간을 중시한다는 직원의 말에 "아, 그렇구나, 이게 여백 사고지"하는 깨달음이다.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비워있으면 비운대로, 너무 차있으면 비우는 그런 여백 사고를 11월 부산 해운대에서 연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