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이 늙어감에 대해
서울은 춥다는데 여기 부산은 영상의 날씨다. 해풍이 불지 않고 햇빛이 드리우는 구유엔묘지(현 유엔기념공원)는 오전 햇살이 2300 여명의 젊은 영혼들의 묘비석에 반사된다. 내년을 준비하기 위해 그 화려한 각종 장미도 싹둑 잘렸고, 사각형으로 가지런히 다듬어진 영산홍만 붉은 단풍잎 색깔로 4월 만개를 기다리고 있다.
출근하면 아침에 묘지 한 바퀴를 돌며 여기에 참든 분들과 나의 하루 살아있음을 생각한다. 난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발가락과 손가락을 움직이며 오늘 아침 눈을 다시 뜰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 아침 산책 중 내 눈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열대여섯 명이 외부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모습이 보여 오지랖이 발동해 다가가 인사를 하며 여기 직원인데 조인해도 되겠냐면서 함께 따라다녔다.
대체로 가이드가 잘 설명했다. 공원에 배속된 문화해설사들이 안 하는 해설까지 곁들여 나도 한수 배웠다.
묘지 내 도운트 수로(Daunt Waterway)가 있다. 그 수로는 안장자 중 최연소 17살의 호주 군인 도운트 이름을 따 지었다. 도운트 수로엔 당초 안장국 11개국(현재 14개국)을 상징해 11 종류의 물고기가 있다는 설명과 새들과 고양이 먹잇감이 되었던 물고기가 아침저녁 출퇴근한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로 윗편에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구골나무(만리까지 향이 간다는 일명 만리향)의 꽃이 (마를린 몬로가 좋아한다는) '샤넬 No 5' 향수의 원재료라는 설명은 처음으로 들었다. 나도 그 길을 지나가며 향수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앞에 보이는 둥근 나무가 구골나무고 나무 뒷편으로 유엔묘지와 유엔 참전국 22개국, 유엔기와 태극기가 펄럭인다
수로를 기준으로 위쪽은 묘지고 아래는 자연 녹지이므로 수로가 죽음과 삶의 경계라는 설명도 한다. 그는 수로 아래에 2005년 조성된 참전용사 묘가 한국전에서 생존해 본국으로 갔다가 다시 본인 희망에 따라 이곳에 온분들의 묘지도 조성되어 있는데 이건 건너 띄고, 수로 아래에 4만여 명의 전사자 참전기념비를 방문해 그중 미국이 3만 6천 명이 전사했다는 말을 한다.
가이드 분이 한국전 참전국이 몇 개국이냐고 묻는데 다들 16개국으로 알고 있고 의료지원국 6개국 포함 시 22개국이라는 사실은 잘 몰랐다. 이에 나의 오지랖이 발동돼 내가 끼어들며 "서울의 최고 명문대 학생들도 모르니 요새 대학 시험에는 한국전 문제가 안 나오는 모양이다"라고 농담을 곁들였었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떨뜨럼해 보였다.
이들이 나중에 공원에 나갈 때 가이드가 내게 와서 볼맨 소리를 한다. 방문자 중 누가 내가 한 말에 불편했다는 말과, 이분들은 대학생들을 지도하는 상담사와 교수가 섞여있는데 학생 취급했다는 얘기를 한다.
아차 싶어 인솔 책임자와 교수로 보이는 몇 분에게 급거 사과를 했다." 제가 오신 분들이 너무 젊어 대학생으로 착각했다며 양해를 구하고, 버스를 타면 제 사과를 여타 분들께도 말씀드려 달라고" 했다. 이분들은 자신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며 내 맘이 편하라고 웃으면서 떠나셨다.
내가 늙긴 늙었나 보다. 내 눈엔 모두 대학생같이 보이니 말이다. 또 늙으면 참견을 많이 하는데 가이드의 해설을 잘 받는 분들에게 오지랖을 부린 거를 보니 말이다.
늙으면 지혜롭고 품위가 있어야 하는데 오늘 또 철없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참견하지 말고 그저 남의 말에 경청을 기울이며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초딩 생각을 다시 한다. 좀 있으면 또 까먹겠지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