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세모 설경
2025년 한 해 1월도 이번 주가 마지막이고, 구정 연휴다.
국내 경기가 안 좋은데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 5시간 전 인천공항에 나가야 할 정도라고 한다. 외국에 많이 왔다 갔다 하며 보니 국내에도 제주, 부산, 강릉, 남해안 등 좋은 곳도 많은데 다들 왜 외국으로 외국으로 가는지 이해가 좀 안 되지만 답답한 국내를 벗어 평상심을 찾으려는 심리적 도피로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국내만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는 것만도 아니고, 트럼트 2기의 계산되었다지만 막무가내식 조폭 수준의 외교정책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특히 트럼프가 바이든이 퇴임하기 작전 해제한 쿠바 테리지정국 재지정 행정명령을 내렸다.
현직에 있을 때 나는 일로 몇 번 쿠바를 방문하며 망가진 경제와 피폐한 쿠바 국민들을 보며 새삼 트럼프의 쿠바 테러지정국 재지정으로 국민들의 곤궁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더욱이 쿠바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한인 후손 5~6세 1천 명이 살고 있다. 작년 수교 발표 후 국내 사업가가 일간지 나의 기고문(2024.2.18 매경 '한•쿠바 관계, 새로운 지평을 열자'를 읽고 한인 후손 청소년을 위해 거액 장학금을 내놓겠다 하여 초청자 선정도 다 끝냈는데 가족 반대로 진척이 안된 아쉬운 일도 생각난다. 내가 코로나 때 생필품과 기초 의약품을 갖고 가서 우리 동포들에게 나누어 준 적이 있는 나로서는 그들이 겪는 삶의 팍팍함을 잘 안다.
작년도에 뜻하지 않게 한국과 쿠바 외교관계 수교가 되고, 최근 주한 쿠바 대사관이 개관되었고 조만간 하바나에 우리 대사관이 열리게 되어 양국 간 교류, 우리의 최소한 인도적 지원이 확대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미국의 쿠바 테러지원국 재지정으로 돈줄과 사람줄이 다 막혀 실질적 협력이 난망하다. 미국은 미국 대로 정치인들이 문제다. 트럼프의 공화당은 대쿠바 강경파의 마이애미 쿠바 공동체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쿠바 봉쇄를 계속이어가고 있고, 피델 카스트로의 계승자들은 그간 정권 연장을 위해 미국 위협을 과대 포장했다. 내치와 외교가 불가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케이스다.
이리 국내외로 불확실하고 암울한 세모에 부암동 집에서 저 멀리 눈 덮인 인왕산이 보이고, 단지 내엔 온통 눈천지다. 내 눈에 보이는 설경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는다. 우리 히꼬(Xico, 멕시코에서 온 웰시 코기로 Me'xico' 이름에서 작명)는 세상사 아랑곳하지 않고 좋기만 하다. 구정이라고 잠시 온 둘째 부부가 와서 집이 복작거리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고기를 구워 먹을 땐 히꼬에게도 고기 몇 점이 얻어걸린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멀뚱멀뚱 보다가 밖에 똥 싸러 갈 땐 굵은 똥을 하얀 눈 위에 싼다. 김이 모락모락 난다. 대변을 본 후 기분이 좋아 눈 덮인 단지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눈보라(blizzard)가 부는 구기동집의 세모 설경(2025.1.27)
눈 내리는 구정 세모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내년 이때쯤은 다른 세상일까. 그때 눈이 오면 세모의 눈을 편하게 볼 수 있을까. 나는 지나친 낙관주의자 팡글로시안(Panglossian, 볼테르가 쓴 소설 '캉디드'에 등장하는 인물로 매사에 낙관으로 바라보는 철학 선생 팡글로스에서 나온 형용사)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