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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동백섬

동백이 지기까지

by 동남아 사랑꾼

나이 든 탓이기도 하고 습관에 여명이 트기도 전에 눈을 뜬다.


침대에 누워 발끌을 오므렸다 폈다가 한 후 손끝도 구부렸다 폈다 하며 "음, 아직 피가 통하고 멀쩡하군"하며 나에게 밤새 안녕하며 소소한 일상의 아침을 연다.


얼마 전 찾아온 내 또래 옛날 직장의 오랜 지인이 우리 집에서 자고 일어나 해운대 바다를 보며 손체조, 발체조를 했다는 소릴 듣고, 요새 따라 하기하고 있다. 심심해서 마누라가 좋아하는 듣기 좋은 클래식을 틀어 놓고 한다.


체조가 끝나면 심한 코로나가 걸려 10일 입원한 때는 빼고 지난 5년간 해 온 듀오링고(Duolingo)로 스페인어를 한다. 남들이 보면 이 나이에 뭐라도 하려고 그러나 보다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정신줄을 놓지 않고 정신을 파릿파릿 하기 위해서다. 이제 루틴이 되어 하루에 잠깐이라도 듀오링고의 부엉이 웃는 앱을 열지 않으면 화장실 다녀온 후 밑 안 닦은 기분이 들 정도다.


그래도 아직 아침은 오지 않는다. 어젯밤 읽다만 책을 읽는다. 내가 책 읽기를 즐겨한다는 걸 아는 후배 지인이 앉은뱅이 독서대를 보내줘 그 독서대에서 다시 책을 읽으며 뇌운동을 한다.


이때쯤 되면 해운대 바다 수평선 언저리가 붉거스럼해지고, 가로등과 고층 건물의 조명등에 반사된 어스름픗하던 어두운 바다도 여명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어김없이 아침은 온다.


세수에 이빨 닦기를 하고 집을 나서 동백섬으로 아침 산책을 나간다. 여기 부산온 후 지난 6개월간 루틴이다. 그 덕분인가, 퇴근 후 해운대 해변을 걷고 일과 중 유엔 묘지(4천 평)를 오전, 오후 1번씩 둘러보는 것 때문인지 다리에 볼록 알이 뵈었다. 뿌듯하다.


동네의사에게 자랑질했더니 동네 의사 왈 운동을 잘못해 알이 나왔다며 자랑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은 안 믿기로 했다. 세상에 선택적 진실, 체리 피킹식의 편의주의가 판치는 요즘, 이 정도의 내 맘대로는 괜찮을지 싶어서다.


동백섬 입구엔 지난 6개월간 내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각종 과일, 야채, 생선을 파는 할머니 노점상이 판을 깔고 호객한다. 하나 팔면 5백 원 밖에 안 남는다며 깎아 달라고 흥정한 산책길 아줌마들에게 읍소한다.


동백섬 입구 할머니 노점상


싸게 야채를 산 할머니는 백구에 이끌려 동백섬 둘레 산책길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간다. 야채 봉지가 성가스러운지 노점상 앞 숲 뒤에 살짝 숨겨 놓고 간다.


나도 뒤따라 동백섬 산책길로 가니 동백이 벌써 잎이 바래 있고, 바닥에 시뻘건, 하얀, 분홍색 동백꽃 잎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낙하의 쓸쓸함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동백꽃은 조금 절정은 지나가고 있지만 볼만하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 가사 중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처럼 해운대 봄은 이제 동백꽃과 같이 익어가고 있다. 그러면 동백꽃도 지고 말겠지만.


동백섬의 동백꽃들


작년 연말부터 생긴 풀리지 있는 수수께끼는 동백 한 나무에서 붉은색 꽃, 흰색꽃이 같이 피는 것이다. 유엔 묘지 동백나무도 그렇다.


자연이치야 모르겠지만, 한부모 밑에 난 자식들도 다 다른데 하는 생각에 이르면 동백나무에서 여러 다른 꽃이 핀들 뭐가 대수인가 하며 총총 걸음을 한다.


이런 공상에 젓어 있다 보면 아침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휙 하고 지나가고, 그 사이 할머니와 백구는 백구가 뒷다리를 들고 오줌 싸느라 지체되지만 저 멀리 가고 있다.


중간쯤 가다 보면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내가 관여한 2019년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오찬 장소인 누리 마루가 나오고, 일련의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가 비 맞아 축 처진 나뭇잎처럼 밑으로 축 늘어져 있다. 해운대 상징인 바닷바람이 불지 않는다.


떨어진 동백꽃 잎 위로 참새 한 마리가 종종걸음을 치고 있고, 키 큰 소남무 저쪽엔 재잘거리는 이름 모를 새들이 아침 인사를 건넨다. 오늘 하루도 건사하기 바란다는 까치 떼들도 소리 내어 짓는다.


동백섬 산책길은 20~30분이면 족하다. 산책길 끝에 아침 운동을 하는 노인들을 지나치는데 자원봉사로 보이는 중년 아저씨가 조그만 티자형 나무를 머리 위아래로, 옆으로 움직이며 아침을 열고 있다.


동백섬 산책길을 빠져나오니 저만치 백구 할머니가 숨겨둔 야채 봉지를 다시 챙기고, 오늘 장사를 마친 할머니 노점상이 주섬 주섬 짐을 싸고, 남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옆에서 돕고 있다. 백구 할머니도 노점상 노부부도 건강하게 살며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다시 동백섬에서 만나길 바란다.


아침 햇살 반짝이는 해운대 바닷물을 보며, 가까이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과 저 멀리 미얀마 대지진으로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에 재산 피해 앞에 망연자실해 있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지인이 내 브런치 글을 읽고 이해인 수녀님 글이 생각난다며 보내줘 공유합니다.


새해에는 동백꽃처럼 / 이해인


새해에는 동백꽃처럼

더 밝게

더 싱싱하게

더 새롭게

환한 웃음을 꽃피우겠습니다.


모진 추위에도 시들지 않는

희망의 잎사귀를 늘려

당신께 기쁨을 드리겠습니다.


어디선가 날라오는

이름 없는 새들도

가슴에 앉히는 동백꽃처럼

낯선 이웃을 거절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겠습니다.


땅을 보며 사색의 깊이를 배우고

하늘을 보며 자유의 넓이를 배우는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지상에서의 소임을 마치고

어느 날

이별의 순간이 올 땐

아무 미련 없이 떨어지는

한 송이 동백꽃처럼

그렇게 온전한 봉헌으로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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