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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방문기(2)

페낭, 아픈 상처의 쿨리 역사가 서려 있는 곳

by 동남아 사랑꾼


인천~KL 경유 페낭행 AirAsia 편 기내에서 내려다 보이는 하늘에 뭉게 구름이 두둥실 비행기 창문 뒤로 가고, 구름 아래로 말레이시아와 인니 수마트라 섬을 끼고 흐르는 말라카 해협의 파란 바다도 보인다.


남중국해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길목에 폭이 좁은 말라카 해협의 끝자락쯤 페낭이 있다.


동남아는 물론 한중일의 중동산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위해 배들이 꼭 지나야 하는 곳이다.


중국은 미국이 남중국해와 이곳을 봉쇄해 중국의 중동산 원유 수입을 막을까 전전긍긍하는데 이런 상황을 '말라카 딜레마(Malacca Dilemma)'라고도 한다.


중국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2013년 미얀마 항구부터 중국까지 가스송유관과 2017년 원유송관을 설치했으나, 그지역이 미얀마 반군 지역이고 가동하더라도 가성비 차원이서 배로 말라카 해협을 통한 방법보다 별로라고 한다(원유 송유관 완전 가동 시 중국 수입량 연 2백만 톤, 약 6% 차지).


중국은 또한 파키스탄 과다르항을 통해 중동산 원유를 파키스탄 육로를 거쳐 중국에 수입하는 별도 루트도 있다.


기내에서 내려다 보이는 말라카는 미중의 물밑 경쟁 속에서 여기에 연루된 말레이시아, 싱가폴 및 인니 3개국의 자체 공동 순찰로 관리되고 있어서인지 조용하고 평온해 보인다. 한때는 말라카에 해적 떼가 자주 침몰해 지나가는 상선을 털기도 했다.


기내 도착 방송이 나온다. 이륙한 후 40분 정도니 서울~제주 거리쯤 돼 보인다.


페낭(베텔의 열매 의미)은 1824년 영국-네덜란드 협약을 통해 먼저 이곳을 차지했던 네덜란드와 합의해 영토를 서로 바꾸었다. 영국은 인니 수마트라의 베네쿠렌(Benecolen) 식민지를 네덜란드에 주고, 네덜란드가 갖고 있던 식민지인 말라카와 싱가폴를 받았다.


양국과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를 양분해 북쪽은 영국이, 남쪽, 지금의 인니 수마트라는 네덜란드가 남의 땅을 자기 물건이나 되는 양 식민지를 맞교환해 가져갔다. 강자가 지배하던 식민지 제국시대는 그랬다(영국은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폴을, 네덜란드는 인니를 오랫동안 식민지 경영을 했다).


두 국가는 식민지가 쪼개져 있으면 경영하기 어려워 서로 식민지를 맞바꾼 것이다. 만약 그때 이런 교환이 없었으면 수마트라는 영국 식민지, 싱가폴과 말라카는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위로 페낭은 1826년부터 싱가폴, 말라카와 딘딩스와 더불어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서 인도 주재 영국 동인도 회사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특한 지위로 있었다. 그 후 영국 인도 제국령(1858~67)을 거쳐 영국 국왕의 직할 식민지(1867~1946)로 법적 지위가 바뀌었다.


페낭은 2차 대전 후 1946년 이후 현재의 말레이시아인 말라야 연합에 흡수되어 현재 말레이시아 13개 주 중 하나가 되었고, 조지 타운(George Town)이 주도다.



OZO George Town Penang 호텔 20층에서 본 페낭 모습


물론 말레이 반도에서 무역항 각축전 대상은 포르투갈이 1511년 몇 척 안 되는 배로 막강했던 말라카를 점령하고, 이어 네덜란드가 포르투갈로부터 이를 빼앗았던 말라카가 핵심이었다.


영국이 1826년 영국-네덜란드 협약으로 말라카를 네덜란드로부터 건네받으면서부터 말레이 반도의 영국 영향력은 공고해졌다. 그러나 영국은 항구로서의 위치뿐 아니라 주석 생산지로서 페낭의 이점에 꽂혀 말라카에서 해협식민지 4곳의 주도를 페낭으로 옮기자 해협식민지의 핵심 자리를 꿰찼다. 령 말라야는 크게 3개의 다른 법적 지위를 갖는 지역(1895~1946, 1946년 말레이시아 연방/해협식민지 3개 중 싱가폴 빼고 페낭과 말라카 포함, 1948년 말라야 연방 및 1957년 독립, 싱가폴, 사바 및 사라왁 포함 1963년 말레이시아, 1965년 싱가폴 축출 후 말레이시아)으로 구분되었는데 싱가폴, 페낭, 말라카로 구성된 해협식민지(일종의 보호국으로 명목은 술탄에게 있었으나 실제 권력은 총독, 나중에 영국 직할시로 승격)는 인도 동인도 회사의 관할로서 싱가폴에 총독과 연방국가 겸임하는 총주재관(General Resident)이 있었고, 셀랑고르, 페락, 네게 리셈블란, 파항 등 4개 말레이 술탄주로 구성 말레이연방(FMS)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주재관이 상주했으며, 나머지 말레이 술탄주로 구성된 비말레이연방(UMS, 태국 국경 근처의 크다, 클라탄, 트렝가누, 조호루 5개 주)에는 영국과 양자관계 틀에서 유지돼 영국 영사관이 주재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 직원이었던 스템포드 라플스(Stamford Raffles)가 조호르(Johor) 왕위 분쟁에 편들기를 통해 승자가 된 조호르 왕을 통해 사실상 싱가폴 개국의 디딤돌을 놓고 추후 1819년 싱가폴에 무역기지를 개설했다. 그 후 영국은 1832년 해협식민지 주도를 페낭에서 싱가폴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페낭은 핵심 위상을 싱가폴에게 내주고, 지금까지 밀리고 있지만, 한때 엄청 중요한 식민지였다.


이런 복잡한 얽히고설킨 말레이 반도를 둘러싼 식민지 열강의 각축의 역사는 한두 번 읽어선 이해하기 어렵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헷갈린다. 그냥 이런 게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넘어가도 상관없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에도 불구하고 페낭은 200년 전 세워진 이후부터 아랍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중국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일본인(페낭이 2차 대전시 해협식민지 중 최초로 점령당했고, 다음이 말라카, 최종적으로 싱가폴이 점령), 2차 대전 후 다시 영국인 그리고 지금의 말레이인으로 오면서 페낭은 인종과 종교의 용광로가 되어 다양한 문화의 향기를 뿜는다.


법적 지위가 영국 식민지 전략상 바뀌었을 뿐 식민지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었다. 페낭은 주석 생산지로서 영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영국은 본국 파견 관리 부족으로 당시 먼저 페낭에 진출해 뿌리를 내린 페라나칸(중국 본토 남성과 현지 말레이계 여성 사이에 태어난 중국계 화교)을 일본이 친일 세력들과 같은 방식으로 악역을 맡는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겼다.


이 중간 관리자들은 가난 때문에 19세기 후반 혈혈단신 페낭에 온 일일 노동자로 쿨리(coolie)들을 착취했다. 이처럼 페낭은 하층 중국인인 쿨리의 아픈 상처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루 일과의 고됨과 고향의 가족이 그리워 마약에 손을 데는 중국인들이 많아지고, 중국 조직배들이 이를 이용해 노동자들이 한 푼도 못 받고 탕진하는 비참한 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들이 흘린 눈물이 어쩜 중국에서 이주한 말레이시아 최대의 호키엔 가문이 수십 년에 걸쳐 지었고, 지금 페낭을 찾는 관광객의 필수 관광지인 '쿠 공씨 사원(Koo Khongsi Temple)' 건물 일지도 모른다.


첫날 저녁이자 마지막 페낭 밤에 쿵 콩씨 사원이 있는 도심쪽으로 갔다. 물어 물어 간 시간이 오후 6시가 넘어 문을 닫아 쿠 콩씨 사원은 건물 앞에서 기념 사진만 찍고 안쪽은 못본 채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지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은 근사하게 했다.


문닫힌 '쿠 콩씨 사원' 건물 앞 사진(사람 지우는 기능을 몰라 그냥 올림. 이렇게 실물 올려도 되나 ㅠㅠ)


땅콩 소스에 듬뿍 찍어 '사테 아얌'(sate ayam), 즉 인니식 닭꼬치 구위를 먹고 메인도 '나시 고렝 캄풍'(Nasi Goreng Kampong), 인니식 볶음밥을 먹었다. 두 차례 인니서 있으면서 먹은 그 맛이다.


페낭을 떠나 KL로 가기전 4.6 일요일 낮에 쿠 콩씨 사원을 다시 가보려고 한다. 혹시 사원 건물 어디 구석에 그리운 엄마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은 쿨리의 암호가 있는지 눈여겨보려고 한다.


소소한 행복한 포만감에 젖은 채 페낭 구석구석의 야경을 구경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는 길을 찾느라 스마트폰 길 찾기와 밤거리에 나온 젊은 페낭 인들에게 물어 물어 호텔을 찾아왔다. 땀이 속옷까지 사우나한 것처럼 젖었다.


길을 가르쳐 준 한 젊은 학생은 한국말로 호텔을 손가락질하며 얼굴에 웃음을 띠며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이게 인천~KL행 MH 편 기내에서 말하던 '말레이시아 친절(Malaysia hospitality)'인가 하는 생각을 얼핏했다.


그녀에게 어찌 한국말을 그리 잘하는지 물으니 한국드라마에 푹 빠진 한류팬이라고 한다. "한국에 꼭 오세요"하며 공치례를 했다. 하나마나한 립서비스다.


명함을 주며 한국 오면 연락하라고 했으면 뜬금없고 이상한 한국인으로 보았을지 싶어 공치례만 할 수밖에 없다. 다른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가던 길을 가던 그 소녀의 뒷모습을 한참 보며, 마음속으로 돈 모아 한국 와서 잘 놀다가 길 바랬다.


이렇게 페낭의 하루는 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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