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락 균형

목욕탕에서 사색

by 동남아 사랑꾼


폭염과 폭우가 이제 뉴노말(new normal)이다.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도 이젠 새롭지 않다.


모처럼 여름휴가를 집에서 빈둥되며 보낸다. '히꼬' 똥과 오줌을 누이고, 가끔 실내 공놀이도 한다. 최근 읽었던 책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침대 옆에 싸놓고 번갈아 가며 읽는다. 또 오랜 해외생활 중 놓친 드라마 시리즈 중 20년이 넘은 황석영의 원작 '장길산'도 보고 10년 전 유행한 '조작'도 보며 보낸다. 지금 이 순간은 김훈의 '허송세월'보단 '빈둥거림'이 더 적절한 낱말이다.


찌는 해운대 한 여름의 태양 빛이 유리로 덮여 있는 아파트가 달궈줘 에어컨을 켜도 시원치 않다. 하릴없이 단지 내 목욕탕에 자주 간다. 사실 마누라 등살이기도 하다. 하지만 목욕탕에 온탕과 냉탕, 온탕이라고 하지만 내겐 열탕처럼 느껴진다.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그 중간 탕, 너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탕인 고달락 탕이 없어 늘 아쉽기만 하다.


목욕탕의 선택 제한은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에서도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지고, 특히 선거 때면 두더러 진다. 정부 관리들이야 중립 의무 때문에 공식적으로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않지만 지역, 다양한 소속감 내지 정체성으로 사적으론 각자의 입장이 있고, 술자리에서 한잔 거하게 하면 본심이 나온다. 근데 요새 정치판은 물론이지만, 학계, 교육계와 예술계에서도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지고, 그 중간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 인간으로 분류돼 양극단의 먹잇감이 된다. 중도가 없고, 그 중도는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관계도 양상은 비슷하다. 91년 냉전 종식 후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맥을 못 추며, 중국은 막 부상 준비 중이던 미국 중심의 세계는 중간과 중립의 공간이 있었다. 중견국과 약소국은 미국과 아직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지만 중국 시이에 오고 가거나 양다리 전략을 택해 체리 피커링의 '안미경중'이 가능했다. 중립정책을 펴던 동남아가 대표적 수혜자이다.


이런 국제 환경은 2017년 트럼프 1기 등장 계기로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2024년 트럼프 2기의 미국 우선정책으로 중견국과 약소국의 선택폭은 좁아졌고 미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트럼프가 4.2 미국 해방의 날로 공표하며 전 세계 국가에게 부과한 관세 폭탄이 미국의 적자폭과 우호 정도 및 전략적 중요성에 트럼프의 즉흥적 감정에 기인해 8.1 각국의 관세율이 결정되었다.


EU, 일본, 한국, 호주와 대다수 동남아(친중 미얀마와 라오스는 40%, 브루니이 25% 싱가폴 10%)는 15~20%의 관세율로 조정되었고, 미국에 밉보인 브라질에게는 50% 고관세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마당에 미국 시장을 바라보며 사는 중견국과 약소국들의 선택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동남아도 매 한 가지다.


우린 국제 정치판의 고딜락 균형은 기대할 수 없을까. 미국의 이렇게 극단의 관세 무기와 자국 중심의 무역에 대한 대안은 없을까. 그게 중국일순 없지만 균형 잡힌 '미국 마이너스 세상'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기대를 해 본다.


우리 국민 다수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도, 그러나 어느 쪽이든 올바른 정책을 취하면 박수와 지지를 보내는 적극적 중도의 폭이 넓어지면 우리 사회는 더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팬덤 정치가 난무한 지금, 이런 기대지만 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해운대엔 구름이 끼고, 시원한 비를 불러올 바람이 음지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아파트 단지 보라색 꽃의 맥문동이 살랑이는 모습을 보며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고달락 가을을 기다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잡동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