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묘지의 제철 꽃들을 보며
눈뜬 아침의 일상에 대한 새삼스러운 고마움이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나 싶다.
눈 뜨면 두 손발이 잘 움직이고 눈이 다소 침침하지만 잘 보이고 옆에 집사람이 있는 일상이 소중해진다.
폭염 내내 설쳤던 잠을 푹 자고, 아침 녘엔 선선 이상의 바람이 불어와 창문도 닫고 홑이불을 덮어야 하는 시간의 도래한 것도 여간 고맙지가 않다. 물론 또 폭염이 한차례 남아있다지만 기세는 꺾이고 있다.
반려견 히꼬의 이른 아침 똥과 오줌 누이기 위해 써야 하는 엘리베이터가 제때에 버튼만 누르면 오는 편리함도 신기하다. 60여 년 살면서 한 번도 곱씹어 본 적 없는 생각들이다.
어제 저녁 우연히 쳐다본 해운대 달맞이 언덕의 고층 빌딩 유리창에 반대쪽 저녁 해가 마치 백열등을 켜 놓은 것처럼 붉게 물든 모습 쳐다보는 행운도 있었다. 지난 10개월 부산 생활하면서도 보지 못했던 풍광이다. 내 주위의 소소한 변화를 운여겨 본 덕분에 얻은 행운이다. 이 풍광을 찍은 사진을 서울 친구들에게 자랑질하며 보냈더니 내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해운대 사는 사람들에겐 누구나 이 공짜 풍경이고 지난 10개월 동안 나에게도 공짜였지만, 그네들도 나도 지나쳐 버렸다. 주위를 들러 보는 여유가 있어야 공짜 풍광도 의미가 있다.
해질 녁 해운대 달맞이 언덕의 고층 빌딩에 비췬 낙조
비 오는 출근길 거리에 핀 여름꽃 하얀 백합이 음지식물답게 큰 나무 그늘에서 활짝 펴 고개를 숙이고, 향긋한 향기로 출근길을 서두른 행인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다. 유엔묘지의 어느 구석에 백합을 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차 안에서 부산영어방송의 비소식에 걸맞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유엔묘지의 여름 제철 꽃들이 비에 흠뻑 맞아 싱싱하다. 폭염에 하루 오전 오후로 스프링클러로 40톤의 지하수로 물 주기를 하지만 부족한데 8월 비가 내린다.
보라색 꽃망울 속에서 흰색 꽃이 고개를 치밀고 올라온 맥문동이 유엔묘지의 그늘진 곳을 채우고, 참배객들이 많이 찾는 메인 인도에 있는 의자 뒤에 놓인 화분의 배고니아도 마지막 자태를 발하고 있다. 군데군데 시든 것 보니 이제 가을꽃에게 자리를 내줄 때가 다가온다.
베고니아 꽃
백일홍은 봄여름가을에 심는 유엔묘지의 단골손님이다. 하얀색, 연분혹색, 노란색의 갖가지 색으로 풍성하게 핀 백일홍 꽃도 비에 흠뻑 젖어 생기가 넘친다.
백일홍 꽃
노란 매리골드도 백일홍처럼 3 계절 꽃이고, 특히 더위에 강하다. 노란 꽃 멜람포디움도 절정이다.
멜람포디움 꽃
여름 꽃하면 뭐니 뭐니 해도 배롱나무 꽃이다. 7월부터 피기 시작한 연분홍 꽃이 만개하고 있다. 비 오는 아침 묘지를 우산(최근 유엔묘지 마크가 있는 8천 원짜리 우산 겸 양산 출시)을 쓰고 걸으면 세어보니 묘지 내 10여 그루가 있는데 몇십 년은 된 노목이다. 꽃도 꽃이지만 그 형태가 마른모꼴이고, 도사 지팡이처럼 꼬불꼬불한 나무 가지에 내려앉은 비로 촉촉해진 모습을 보니 화창한 날의 메마른 가지 때와는 달리 새로운 감성을 자아낸다.
폭염과 폭우 속에서도 붉게 피는 '여름꽃' 배롱나무꽃
머지않아 이런 여름 꽃들도 제 수명을 다한다. 얼마 전 가을꽃 모종이 들어왔다 백일홍과 비슷한 거배나와 백일홍, 매리골드다. 한 달 반 온실에서 살다가 유엔묘지 이곳저곳에 식재된다.
세상사가 절기가 있고, 바뀔 때는 바뀌는 게 자연이치라고 여기지만, 장미만은 계절에 상관없이 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아쉬움을 들어준다.
장미처럼 때로는 시들고 지지만 다시 피어나듯 우리 인생에 얼마나 많은 그런 동반자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도 좋을 8월 비오는 날의 유엔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