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그룹 회장의 유엔묘지 방문
한여름의 끝자락이다.
아직 말매미의 바리톤 모노톤이 유엔묘지 배롱나무와 메타 세콰이어 나무 가지 어디에 붙어 웅~웅~거린다. 이소리를 들으니 그 옛날 고향집 살구나무에 매달려 울던 매미가 다가오는 생명의 종말이 서러워 울던 이맘때가 생각난다.
9.3 서울 굴지의 그룹 회장님이 유엔묘지에서 모방송의 유엔 창설 80주년과 한국전쟁 발발 75주년 특집 방송 인터뷰차 오셨다. 8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오전에 왔다가 촬영 1 시간하고 이른 오후 KTX 타고 가셨다.
그분은 촬영 전 사무실에서 차 한잔 하며 말씀을 나누는데 보청기를 끼셨지만, 큰소리로 말을 해야 대화가 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평소 지론대로 유엔의 날 국경일 제안 이야기가 나오자 조리 있게 말씀하시고 소신을 피력하시는 모습을 보니 눈에 보이는 신체적 노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정정해 보였다. 특히 그분 말씀 중에 유엔묘지에 묻힌 2,333명의 유엔군 안장자들의 희생 의미로 자신과 같이 한국전쟁 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몰라도, 그 후에 태어난 모든 분들은 유엔군의 희생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도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담이 끝나갈 무렵에 그룹 회장님이라서 돈이야 많겠지만 유엔묘지 손님이라서 점심 한 끼 모시는 게 예일지 싶어 말씀드리자 20분 만의 속성 점심을 했다. 그 때문에 뜨거운 미역국은 손도 못 대고 나물 비빔밥만 드셨다.
이 와중에 돈이 많아도 점심은 다음 일정 때문에 여유 있게 못 드시고 부산역으로 총총히 가시는 모습을 보니 그분이 평생 쫓기며 살다가 또 그러다가 가실지 싶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엉뚱한 존재의 이유까지 나에게 묻게 된다.
돈 많은 회장님도 거동이 불편하고, 살아가야 할 날이 산 날도 많지 않겠다는 데 까지 미치면서 이곳에 온 영욕의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과 겹쳐 부와 명예도 다 찰나적이고 허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말매미가 혼자만 서러운 듯 울부짖지만, 인간 또한 자기 운명 앞에 작고 허무한 존재임을 모르나 보다.
말매미가 가고 나면 가을의 전령사인 빨간 고추잠자리가 유엔묘지의 파란 가을 하늘을 수놓을 것이다. 말매미가 고추잠자리에게 자리를 내주듯, 부와 권력을 지닌 구세대들도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떠나는 뻔한 이치를 우리는 잊고 지내지 않은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