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고양이의 비밀

2024. 1. 2.

by 김경윤

고양이를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꽤 많은 고양이를 키웠는데, 이십 년 넘게 산 고양이는 한 마리뿐이다. 이 고양이는 올해 2월로 드디어 스물한 살이 되어 기록을 경신중이지만 지금은 우리 집에서 기르지 않는다. 약 구 년 전 일본을 떠나며 당분간 고양이를 못 기를 사정이라 당시 고단샤 출판부장이던 도쿠시마 씨 댁에 맡겼다. 실은 “전작 장편을 하나 써드릴 테니까 부디 이 아이 좀 부탁합니다.”하고 떠안기다시피 했더랬다.

그래도 그때 '고양이와 교환'해서 쓴 장편이 결과적으로 내 책중에 제일 많이 팔린 《노르웨이의 숲》이었으니까, 녀석을 복덩이 고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도쿠시마 씨는 지금은 상무이사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그리고 자택이 있는 마쓰도에서 오토와의 회사까지 중역용 제트 헬리콥터로 주 3일만 출근합니다--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지금도 매일 만원 전철을 갈아타면서 출퇴근하는 모양입니다. 애쓰십시오. (92~93쪽)




이 에세이집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문학동네판) 6권 중에 한 권이다.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아시다시피 순전히 '고양이'가 제목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고양이책 패티시(^^)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고양이책'만 읽고 있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고양이 얘기는 별로 없지만 읽는 재미가 있다. 하루키의 에세이 중 걸작을 뽑아서 그런지 글의 수준(?)도 고르다. 물론 일본을 배경으로 해서, 일본 독자를 대상으로 해서 썼기에 한국독자인 나로서는 싱크로율이 별로 높지 않지만, 일본인들의 군상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맘 편하게 읽었다.


물론 더욱 눈여겨 읽은 대목은 고양이를 소재로 해서 쓴 에세이고, 위의 인용구도 그중에 표제에 해당하는 <장수 고양이의 비밀>의 한 대목이다. 이외에도 <장수 고양이의 비밀 : 출산 편>과 <장수 고양이의 비밀 : 잠꼬대 편>이 있다. 각각 인상 깊은 대목을 인용해 본다.


"그도 그럴 것이 -- 세상의 멋진 고양이가 대개 그렇듯이 -- 뮤즈도 마지막까지 평소에는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가족으로 사이좋게 같이 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것이 한 겹 끼어 있었다. 기분 내키면 응석을 부리긴 해도 '나는 고양이, 당신들은 인간'이라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특히 이 고양이는 머리가 좋은 만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면이 컸다.

그래도 새끼를 낳을 때만은 자신의 전부를, 말린 전갱이 구이처럼, 유보 없이 내게 맡겼던 것이다. 그때 나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조명탄이 올라가듯이 그 고양이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구석구석까지 생생히 볼 수 있었다. 고양이에게 고양이의 삶의 있고, 응분의 생각이 있고, 기쁨이 있고, 괴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출산이 끝나면 뮤즈는 다시 원래의 수수께끼 가득한 쿨한 고양이로 돌아갔다.

고양이란 좀 이상한 동물이죠." <출산 편>(140~141쪽)


"고양이는 눈을 뜨고 내 얼굴을 힐끔 보더니, 묻는 말에는 아무 대꾸 없이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 다음, '이 인간이 대체 뭐라는 거야?' 하듯이 이불에서 나와 고개를 저으면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때 나는 '이 고양이는 분명히 뭔가 감추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고양이가 자신의 중요한 비밀을 무심코 사람한테 들켰고, 그것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은 사실 말을 할 줄 알지만 알려지면 귀찮으니까 교묘히 능력을 감추고 사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뒤로 뮤즈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 고양이란 정말이지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동물이다." <잠꼬대 편> (144쪽)

<잠꼬대 편>의 삽화. 뮤즈는 최면을 걸 줄도 안다.

고양이 손을 꼭 잡고 출산을 돕는 젊은 하루키가 떠오르고, 고양이랑 같이 자다가 고양이 잠꼬대를 인간의 소리로 듣는 하루키의 능력을 경탄하며 읽었다. 정말 고양이는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지만, 귀찮아서 들키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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