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에 살면서 고양이를 관찰하다 보니 코리안 쇼트헤어(약칭 코숏)가 대부분이다. 원래 고양이가 아프리카에서부터 퍼져나갔으니, 한국 토종 고양이는 없는 셈인데, 그래도 다른 나라에서는 품종개량을 통해서 다양한 모양의 고양이들을 육종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품종개량의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대략 6~7종의 한국 고양이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대부분 가파도에서도 관찰 가능한 고양이들이다.
한국 고양이의 역사를 뒤져보니, 실크로드를 거쳐서 중국으로 들어온 고양이들이 4세기 후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불경의 유입에 따라 고양이들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쥐들이 불경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한다는 목적이었다.
고양이가 들어오기 전에는 삵을 가축으로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야생 삵(Prionailurus)은 중국 북부에서 농경의 발달과 함께 길들여졌고, 따라서 이들은 서아시아에서 기원한 현생 고양이(Felis)와는 서로 별개의 집안이다. 대구에서 출토된 집모양 토기(기원후 5~6세기)에도 쥐와 살쾡이가 묘사되어 있다. 또한 경주 인왕동의 우물 유적(기원후 8~9세기)에서는 제물로 바쳐진 짐승 가운데 5마리의 살쾡이가 확인되기도 했다.(위키백과 참조)
한국에 정착한 고양이들은 주로 쥐 등을 잡는 실용적 목적에서 키워졌고, 돌보거나 사랑하는 존재를 취급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고양이는 버려지거나 홀대를 받은 것 같다. 고양이가 가축으로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여말선초쯤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은 이색의 글에 고양이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내는 시들이 남겨져 있다. 조선 시대의 이순지(1406~1465)가 지은 <선택요략>에서는 고양이의 거세를 가리키는 정묘(淨猫)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때부터도 고양이 중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양이를 사랑한 문인으로는 서거정(1420~1488)을 들 수 있는데, 그가 쓴 <사가집>에는 고양이 관련 글이 14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직접 고양이를 기르고, 금손(金孫)이라는 이름도 지어줄 정도로 고양이를 사랑한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기간에 고양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주목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쥐를 잡는 등 실용적인 차원에서 기르던 고양이는 이제 애완동물로 변모하게 된다. 영조 시절 양반가에 묘마마(猫媽媽, 요즘 말로는 캣맘)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고양이를 많이 기르며 비단을 입히고 음식을 먹이며 곁을 떠나지 않으니, 사람들이 묘마마라 불렀는데 묘마마가 죽자 고양이 수백 마리가 집을 둘러싸고 며칠을 슬피 울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양이들을 기르기 시작하자 예술작품에도 고양이가 등장하였다. 숙종 때 도화서 화원이었던 변상벽은 고양이 그림을 잘 그려 별명이 변묘(卞猫)였다. 한편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 '묘(猫)'의 발음이 70 노인을 뜻하는 한자 '모(耄)'와 비슷해서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이 소재로 사용되었다. 고양이와 함께 그려진 나비는 80을 뜻하고, 참새는 작위를 뜻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변상벽이 그린 고양이 작품들
변상벽 외에도 김득신이나 김홍도도 고양이 명작 그림을 남겼다.(위키백과 요약)
김득신이 그린 <야모도추도>와 김홍도가 그린 <황묘도>
그림에 등장하는 고양이들과 지금 내가 가파도에서 본 고양이들의 대차가 없다. 대부분 코숏이다. 역사는 이렇게 이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