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2024. 2. 28.

by 김경윤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은 다음과 같은 내면 거울의 두 가지 측면을 결속시킨다. 즉 오래도록 지속되는 불변의 특성과 지금의 자신이 되기까지 끊임없는 자기실현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기실현은 여러 이야기와 지속적인 해석, 수정을 허용하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이거나 완결될 수 없다. 이처럼 자기실현은 자기 서사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아온 경험의 독단성이나 무작위성을 방지하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내적 일관성을 이루는 사람을 (자기)이해하게 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자기성'은 서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시간성을 성찰하는 능력, 실패와 승리를 파악하는 능력, 시작과 목표가 있는 이야기, 시간 순서대로 그리고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난관 극복 에피소드를 형성하는 능력 덕분에 우리가 누구인지 인식한다. 나는 불변의 존재이자 발전의 존재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속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보물이자 보물 지도이며 보물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누구이며 어떤지는 내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통해 확립된다. (136~7쪽)



<이야기하는 원숭이 : 신화, 거짓말, 유토피아>라는 원제를 가진 이 책은 여러 모로 흥미진진하다. 공저자인 자미라 엘 우아실 (Samira El Ouassil)과 프리데만 카릭 (Friedemann Karig)은 "좋은 이야기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첫째, 스토리텔링이라는 문화기술이 왜 우리 인간에게 그토록 권능을 발휘하고 생존에 중요했는지, 이야기하는 원숭이인 우리가 오늘날 왜 그 무엇보다 이야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지 추적하"고, "둘째, 우리 삶과 역사, 사회의 어떤 영역이 어떤 내러티브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지, 그 결과 수십억 사람들이 그러한 내러티브로 얼마나 고통받는지를 보여

주"고, "셋째, 어떤 내러티브가 참되고 더 건강하고 생산적이며 나아가 -- 유토피아적 미래라는 의미에서 -- 더 좋을 수 있는지 탐구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이야기는 힘이 세다. 긍정적으로는 생존을 가능하게 해 주고 정체성을 형성하고 역사를 기록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거짓말을 양상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하고 사회를 붕괴시키고 위험을 초래할 있다. 그것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탐구함으로써 이야기꾼 인간(호모 나렌스Homo Narrans)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이야기에 대한 저자들의 지적 탐구는 광범위하고 종횡무진이다. 영웅이야기, 신화이야기, 저커버그 신화, 디지털 시대에 아이폰이야기, 내러티브 전쟁, 어른동화로서의 호모 이코노미쿠스, 왕의 발명, 흑인의 발명, 유대인의 발명, 우파적 이야기로서의 스파르타, 스타워즈, 디즈니 월드 이야기, 독일과 미국의 이야기, 성서이야기, 점성술가 탈정치화 이야기, 트럼프 파시즘 그리고 정체성 정치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표면과 심층과 의미를 파고듦으로써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 위치를 파악하고 우리가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전망한다.


이야기를 쓰고 말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아온 나로서는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를 깊이 있게 고민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시점의 나에게 매우 적절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유용성은 말하고 쓰는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온갖 거짓말과 가짜뉴스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도 자신의 처한 위치와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책이다. 우리가 단순히 재미로만 여겼던 이야기들 속에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세뇌시키고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누구나 이야기꾼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인터넷 시대에 우리는 어떤 이야기들을 생산하고 확산하고 있는지 메타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흥미진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 대신 이야기를 생산하는 AI의 출현은 이야기꾼인 인간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든다. 시대는 변하고, 매체는 발달하고, 인간의 이야기는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 거의 이야기의 홍수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홍수가 인간에게 재난일까, 구원일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들의 마지막 조언을 기록함으로 이 글을 끝내자.

"우리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으로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그것은 위기 상항에 대응하는 안보 훈련에서 가장 자주 듣는 조인일 것이다. 위험이 임박했을 대 위험해지기 전에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다. 말하자면 주인공이 되지 말고 이야기하는 원숭이로 남아 있는 것이 좋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라. 그리고 이야기를 확실한 해피엔딩으로 시작해보라. 여러분이 어느 지점에서 주인공이고 어느 지점에서 적대자인지 솔직하게 자문해보라. 유토피아를 만들고 낙원 상태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용기를 가져라. 지금까지 감히 꿈만 꾸었던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기 전에 방아쇠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의 여정을 오늘 바로 시작하길 바란다."(5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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