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먼지들의 책방

2024. 2. 26.

by 김경윤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

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

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 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


(혹시라도 기역아 먼지라니, 곧 망하라는 뜻이냐고 언짢을 것도 같아 살짝 귀띔하는데. 우리가 먼지의 기세를 몰라서 그래.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


―「순한 먼지들의 책방」 전문 (22쪽)



이순(耳順)에 도달하니 시 읽기가 부끄러워진다. 60이 넘게 살았으면서도 시인들의 시어가 낯설 때, 시인이 고향의 산과 들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말할 때, 그리고 동네 어르신이나 동무나 친척들의 이름(또는 별명)을 당당히 시어에 올릴 때,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게다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기억이나 추억을 소환할 때, 나는 마음이 어두워진다. 나라고 어린 시절이 없었겠냐마는,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망각의 강에 흘려버렸다. 그 흔한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시를 읽다가 울컥 목이 막히고, 주르륵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데, 나이 탓인지 내 몸이 내 의지를 배신하고 마음의 소리에 곧장 반응할 때가 많다. 나이가 많으면 눈물이 많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우영 시인의 신작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에 나오는 시를 읽으며 나는 많이 부끄럽고 힘들었다.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게다가 시는 아무 때나 읽는 게 아니다. (왜 나는 매표소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시를 읽었던고.)


시집을 처음 대하면 나는 우선 표제시부터 찾아 읽는다. (어떤 시집은 표제시에 없을 때가 있다. 한참을 뒤지다 보면 시어의 한 구절을 표제로 쓰기도 한다.) 다행히 있다. 위에 인용한 시다. 4연은 전체가 괄호 쳐져 있는데, 편지로 치면 '추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욱 따뜻하고 친근하게 읽힐 수 있다. 특히 4연에서 호명한 기역이는 나도 아는 시인이고, 얼마 전 작은 책방을 차렸다. 책방이름이 '기역책방'이던가? 선배 시인이 후배 시인이 차린 책방에 선사한 시다. (송기역 후배는 이 시를 읽고 얼마나 좋아했을까. 눈에 선하다.)


광주 동구 서석동에 위치한 기역책방(사진 :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물론 이 시는 책방이 잘 되라고만 쓴 시는 아니다. 이 시는 시인의 시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먼지'는 삶과 죽음의 다른 모습이고, 시간과 공간의 모습이며, 큰 것과 작은 것의 시작이고, 지구와 우주의 출발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먼지에서 시작되어 먼지로 끝난다. 먼지를 본다는 것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시작과 끝을 통찰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스모-에콜로지(Cosmo-ecology)! 심지어 시인은 귀신과 내통하고 동물과 소통하며 사물과 대화한다. 신통방통한 일이렷다!


고양이를 소재로 한 시도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가파도에 살다 보니 고양이(또는 개)가 등장하면 눈길이 간다. 가슴 먹먹하면서 따뜻한 시다. 제목은 '바람이 궁뎅일 쳐들고'


저것이 무언가. 용인 송담대역 주변, 손 닿기 어려운 도로가. 걸레 같은 게 뭉쳐져 있다. 가까이 스치며 바라보니 이런이런. 처참하게 으스러진 한마리 새끼 고양이.


넘어갈 수 있다고 여겼겠지. 엄마는 건너갔을 테니까. 제 발걸음 믿었을 거야.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만큼 앞뒷발이 재발라졌거든. 참새를 집적일 정도로 온몸이 날렵해졌고. 과감하게 뛰쳐 올랐겠지. 세상은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니. 부딪혀 튕겨 나가며 어리둥절, 절명하지 않았을까. 몸이 떠난 혼백조차 뻣뻣하게 소스라쳐서.


슬픔이 솟구치기 전 태초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일까. 저 어린것이 무서운 기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나가는 차들 끌어들여 제 흔적 말끔하게 지우며.


후텁지근한 거릴 바람이 이파리 물고 건너간다. 새끼 냥이라도 되는 것처럼 싸목싸목 궁뎅일 쳐들고.


1,2연의 비극적 정조가 3,4연에서 뒤집힌다. 이제 바람이 된 새끼 고양이는 자기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우고, 이파리를 물고 싸목싸목('천천히'의 전라도말) 궁뎅이를 쳐들고 거리를 지나간다. 장회익 식으로 말하면 낱생명이 온생명으로 변하는 것이고, 비명횡사한 주검에 대한 우주적 조사(弔詞)이다. 어둠이 환하게 밝아진다.


시집 뒤표지를 보니 진은영 시인이 정우영 시집에 바치는 시가 있다. 내가 정리하는 것보다 훨씬 시적이고 정우영의 시정신을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이를 인용함으로 이 글을 갈음한다.

그에게 시는 아름답고 쓸모없는 참견

돈의 논리만 유용하다 떠드는 세상에 자꾸 끼어드는

‘망초꽃’과 ‘동백’과 ‘햇살밥’의 환한 고요


시는 고장난 ‘뻐꾸기시계’

세상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라고

아무 때나 울어대는 시계


시는 벗겨진 운동화 한짝

맨발로 뛰어가다 쓰러진 청년을 가리키며

“저기에 내 사람이 있다” 흐느끼는,

아무 데도 못 가는 기다림


그에게 시인은

해진 삶의 옷을 걸치고 가는 모든 이를 쫓아가서

그 옷들을 대신 걸치고 갓 지은 시의 옷을 벗어주는 사람


그러니까 시는 ‘먼지’의 사랑이다

어떤 견고한 고통도 먼지가 될 때까지 돌보겠다는 맹세

그 영원하고 순한 사랑을 믿는 이가 정우영 시인이다

-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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