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는 역사를 만드는 삶이다. 낡고 타락하고 오염된 것을 부수는 행위다. 그 도전이 어찌 성공하겠는가. 가치 있고 의미 있으니 덤벼든다. 그렇게 살아야 하거늘 살지 못하니 동경했을 터다. 고상함은 역사가 만든 삶일 터이다. 휘몰아치고 할퀴고 내동댕이치고 난 다음의 모습이다.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은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내가 그 삶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새롭게 세우는 삶이 아니라, 그 무엇에 휘둘리다 겨우 벗어나 있는 삶 말이다. 처음에는 타협이고 변절이고 순응인 줄로만 알았다. 애써 부정하고 멀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부끄럽게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위화가 일러주었다.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든 결국 우리가 놓일 자리는 고상함의 자리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고민했다. 이 자리에 서는 일은 쉬운 일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부끄럽고 남사스럽다면 고상함이라 이를 수 없다. 젊은 날 숭고를 집착했다면, 이제는 고상함의 자리에 이르려 애써야 한다. (169쪽)
고양시에 살면서 분에 넘치는 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살갑고 따뜻하고 지적인 친구와 같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책을 좋아하고 인문학적 교양이 넘쳐나면서 유머(?)가 있는 이권우 형이 그중 한 명이다.(이권우는 나보다 한 살이 많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와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그는 나와 동갑이다.)과 함께 한양문고에서 <한양문고 세입자들>을 진행한 것은 나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궁금하면 유튜브에 '한양문고 세입자들'이라 치면 많은 책소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책이 나오면 서로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번에 나온 《발견의 책읽기》(오도스, 2024)는 내가 이미 여러 차례 간단히 소개한 바 있다. 가파도를 떠나 이틀 외박하면서 내가 들고 간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거리에서 밴치에서 대합실에서 숙소에서 짬짬이 틈틈이 읽었고, 책에 소개된 몇 권이 책은 송악도서관에서 대출하였다. 책을 소개한 책이니, 책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권우가 권하는 책 중에서 송악도서관에 있는 책을 3권 빌렸다.
책에서 소개한 책들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이권우의 생각과 삶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가 쓰는 약간은 예스러운 문체도 친근하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위화의 《인생》이란 소설을 읽으며 필자가 느낀 소감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찡해졌다. 만약에 이권우가 곁에 있다면 이 구절을 읽어주며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가슴에 대고 찌찌뽕(^^)을 해주었을 것이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꿈은 거룩해지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져라"는 예수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 거룩은 언감생심이고, 경직되거나 변절하거나 추레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자와 장자를 만나면서 나는 그저 자연스럽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으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어찌 삶이 자연스러움을 쉽게 허락하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상처투성이의 삶이 되어 낡고 늙어가고 있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책을 읽으며, 무너지는 마음을 수선하고, 깨끗한 삶을 바라며 글을 쓴다. 그러한 삶을 '고상함'이라 할 수 있을까?
비록 위대한 사람처럼 숭고한 삶에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삶에 지치고 역사에 치이고 나이에 한숨이 나오고 경제생활에 시달려 힘들어지더라도, 쓰러진 다리를 추스르고, 무너진 어깨를 보듬고, 감기는 눈을 다시 뜨며, 오늘 하루 한 발 한 발 용기 있게 버티며 살아가는 삶이 '고상함'이라면 내 곁에는 고상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것이 나의 자랑이기도 하다. 이권우의 책은 그런 고상함이 빚어낸 인생작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