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호텔에서 묵었으나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이라 아침 일찍 깼다. 오전 7시.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것이 감기기운이렷다. 어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자. 샤워물의 온도를 한껏 올리고 몸이 벌게지도록 샤워를 마치니 감기기운이 사라진 듯하다. 짐을 정리하여 일찌감치 호텔을 나서서 홍마트로 향한다. 홍마트에 들러 미리 메모장에 적어둔 식재료들을 카드에 담아 계산대로 향한다. 별로 산 것도 없는 것 같은데 65,040원. 아이고야, 똥거리 값이 장난이 아니구나. (대한민국 물가가 세계 1위란다.) 박스에 담아 11시 배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택시를 타고 운진항으로 향한다. 도착하니 7시 50분. 아직 첫배 출발시간까지 한 시간 넘게 남았다. 여기까지는 원래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일기(日氣)가 수상하다. 선창가에 바람이 거세게 분다. 8시가 되자 마라도는 풍랑이 거세서 운항중지를 통보한다. 그럼 가파도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란다. 그리고 8시 30분이 지나자 가파도도 오전 운항을 중지한다고 통보한다. 9시 첫배를 타고 가파도로 가기는 글렀다. 오후 배는 1시부터 운항되는데, 그나마도 미정이다. 오후 1시가 되려면 무려 4시간이 넘게 남았다. 그동안 뭘 한다?
아침 식사를 황태해장국으로 해장하고, 어제 들르지 못했던 도서관에 가보기로 한다. 전날 이권우의 책을 읽으며 읽고 싶어진 책들이 있었다. 거금 2천 원을 들여 251번 직행버스를 타고 대정읍사무소에서 내린다. 읍사무소에서 송악도서관까지 걸어서 10여분. 도서관 앞 CU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뽑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몸을 아무리 뒤져도 핸드폰이 안 나온다. 어딘가에 놓고 오거나 떨어뜨린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진다. 모든 경제활동기록과 스케줄 기록, 연락처 등이 사라진 것이다. 평소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 이럴 때일수록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되뇐다. 어디에 핸드폰이 있을까? 도서관까지 왔던 길을 역순으로 밟아가며 길바닥이니 편의점이니 정류장이니 샅샅이 뒤졌다. 없다. 도서관 사서에서 전화를 빌려 내 번호로 전화를 해봤으나 받지를 않는다. 미친다. 혹시나 운진항 매표소에 두고 왔나? 운진항 매표소 전화를 수소문하여 전화를 걸었으나 없단다. 아이고. 버스를 다시 타고 운진항 종점으로 돌아온다. 거리에도 도서관에도 편의점에도 매표소에도 없다면 필시 버스를 타고 오다 좌석에 떨어뜨린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9시 10분발 251번을 탄 것을 기억해 내고, 종점에서 대기 중인 같은 회사 기사님께 분실사실을 알리고 9시 10분발 버스를 모시는 기사님과 연락을 취한다. 있단다. 휴우, 살았다. 그런데 버스가 제주공항을 거쳐 돌아오려면 오후 1시 40분이나 되어야 한단다. 나는 적어도 1시 배를 타야 한다. 늦는다. 기사님께 간청하여 12시 40분에 운진항에 도착하는 다른 기사님이 가져다 주기로 약속을 받는다. 전화를 건네받고 뛰어가면 1시 배는 탈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려 대합실 좌석에 앉아서 이권우의 책을 다시 읽는다. 마음 가라앉히는 데에는 독서만 한 것이 없다.
직원용 식당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일찌감치 1시 배 티켓도 받아놓고, 시간에 맞춰 핸드폰을 돌려받으려고 대기 중인데, 가파도행 모든 배편이 기상악화로 결항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제는 자발적 외박이었는데, 오늘은 강제적 외박이다. 어제 호텔비용 3만 원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오늘 다시 3만 원을 쓰려니 가슴이 쓰리다. 어쨌든 핸드폰을 돌려받을 시간이 되어 정류장에 갔더니 40분이 지나 53분이 되어서야 251번 버스가 도착했다. 연착이다.(이런 상황이라면 핸드폰을 받고 1시 배를 타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핸드폰을 받아 들고 다시 매표소에 오니 운진항 매표소 직원이 선사 2층에 숙직실은 아니고 휴게실이 있는데, 이불은 없지만 바닥이 보일러가 되어 따뜻하니 거기서 하루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친절을 베푼다. Why not!(선사에 그런 공간도 있었던가?) 단체 버스를 타고 관광 오면 관광버스 기사님들이 쉬는 곳이란다. 커피도 있고, 만화도 있고, 컵라면도 있고, TV도 있고, 심지어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도 있는 공간이다. 샤워실과 이불만 없다 뿐이지 호텔보다 편의시설을 잘 갖춘 곳이다. 3만 원은 굳고, 숙소가 정해졌으니 이제 걱정은 해결되었다.
오늘 가파도로 못 들어가니 다시 시간은 넉넉하다. 오후 시간을 보람차게 보내자. 이번에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다시 버스를 타고 송악도서관에 들러 빌리려던 책을 빌리고, 빵집에 들러 빵도 넉넉히 사고, 다이소에 들러 넥워머를 3천 원에 구입하여 목에 두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운진항에 도착하여 근처 식당에서 회덮밥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선사 2층 휴게실 컴퓨터를 틀어 오늘 일을 정리한다.
배가 뜨지 못하고,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그 핸드폰을 찾으려고 바람 부는 추운 거리를 헤매고, 노심초사하며 수소문하느라 고생한 것은 불행과 고생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안 좋은 일은 이렇게 한꺼번에 벌어지는가? 한편 결국 핸드폰을 천신만고(?) 끝에 찾게 되었고, 따뜻하고 편의시설이 많은 공짜 숙소를 얻게 되었고, 인터넷이 되는 숙소 컴퓨터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핸드폰을 결국 잃어버리고, 숙소마저 얻지 못했다면 오늘 하루는 정말 미치도록 꿀꿀(?)했으리라. 가파도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혹시 내일도 못 들어갈 수도 있지만 (기상이 만만치 않다.), 오늘의 불행과 고생을 넉넉히 보상받는 다행과 친절을 경험한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상황이 변하여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된 것일까? 오늘 하루, 스펙터클하게 지옥과 천국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했다. 어쨌든 끝이 아름다우면 하루가 보람찬 것이라 여기며 길고 긴 하루 보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