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고양으로 돌아갑니다. 반 년 만입니다. 5일간의 휴가입니다. 환갑을 맞이하여 가족과 친구들과 지내기 위해서가 첫 번째고, 병원에 정기점진을 받고 약을 타기 위해서가 두 번째 이유입니다. 8일에는 한양문고에서 친구들과 조촐한 잔치를 치르고, 10일에는 고양에서 오랫동안 같이 활동했던 인문학 모임인 귀가쫑긋의 월례공개강좌를 진행합니다. 12일에는 동녘교회에서 평신도 설교를 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퐁당퐁당 행사가 많습니다.
그 사이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친척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납니다. 가파도에서는 단순하게 지내는데, 고양으로 오니 정신이 없네요. 1년치 일들을 5일 만에 해치우는 기분입니다. 그래도 기분이 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본래 고향은 서울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이제 모두 재개발이 되어, 어린 시절 흔적은 눈을 뜨고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자란 고양이야말로 저에게는 고향과 진배 없습니다. 아이들과 놀았던 골목골목 그대로이고, 아내와 함께 걸었던 호수공원도 여전할 것입니다. 친구나 후배들과 술을 마셨던 곳도 변하지 않았겠지요. 눈을 감아도 선하게 그릴 수 있는 곳이 바로 고양입니다. 그러니 고양으로 가는 것이 귀향이 맞지요.
명절날 고향으로 돌아가면, 바리바리 선물을 싸가야겠지만, 그저 몸만 달랑 가지고 올라갑니다. 가파도로 내려갈 때보다 조금은 살은 빠졌고, 피부는 검어졌고, 근육은 늘었습니다. 정신도 훨씬 느긋해졌습니다. 처지(處地)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는데, 가파도에 내려와 살다보니 바깥 풍경뿐만 아니라 내면의 풍경도 달라졌습니다. 아침마다 바다와 산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일출과 일몰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갑니다. 선생으로 대접받으며 살다가 매표소 직원으로 대접하며 살아가면서 잡생각이 없어졌습니다.
친절하게 살자, 아침마다 집을 나서며 스스로 다짐합니다. 동서양, 고근현대 철학의 공통 결론이 ‘사랑하라’이고,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지침은 친절입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친절할 수 있습니다. 책 제목 말마따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세상에 홀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외딴 섬에서 주민들과 관광객들과 같이 지내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실천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친절이 태도가 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친절하려면 나를 비우는 일이 우선입니다. 내 속에 ‘이기적인 나’가 살아 있으면 친절할 수 없습니다. 자존심이 꿈틀거리고, 자만심이 치솟아 오릅니다. 내 속에 내가 꽉 차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반대로 나를 비우면 넉넉한 공간이 생깁니다. 여유가 생기고 온기가 생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쉴 자리가 생깁니다. 굳이 나와 같지 않아도, 그저 자리를 내어 주고, 그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화답합니다. 불협화음이 아니라 존재들의 화음이 마음 속에 퍼집니다.
굳이 종교인이 되지 않더라도 가파도는 영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내려놓고, 비우고, 하늘과 땅, 자연을 채워갑니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느냐는 장자의 물음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텅 빈 마음으로 고양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고양인들의 환대와 사랑을 느끼며 가파도로 돌아갈 것입니다. 늘 반가운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축복을 이 생애에서 누립니다. 고맙습니다. 지면으로라도 이렇게 귀향 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