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맹자의 구성
현재 전해지는 《맹자》는 총7편을 상하로 나누어 14편으로 구성되었고, 총 260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크게 7편을 살펴볼까요.
1편 : 양혜왕
맹자가 노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41세부터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제후들과 만났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상편은 7장, 하편은 16장으로 되어 있지요. 양혜와, 제선왕, 추목공, 등문공, 노평공 등 제후들을 만나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했어요.
2편 : 공손추
맹자가 제나라 출신 제자인 공손추와 나눈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맹자가 제나라에서 했던 말이나 대신들과의 대화들도 나타나지요. 상편은 9장, 하편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3편 : 등문공
맹자가 등나라에 있을 때 등문공과 그의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가 상편에 나오고, 하편에는 맹자의 행실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들을 주로 담고 있지요. 상편은 5장, 하편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또 묵가사상이나 종횡가사상에 대한 반론도 담고 있습니다.
4편 : 이루
맹자의 어록들을 모아놓은 편인데요. 요순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선왕들의 이야기, 어진 정치에 대한 이야기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있지요. 상편 28장, 하편 33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이야기들도 등장해요.
5편 : 만장
맹자와 수제자인 만장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만장이 유가에서 숭상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구심을 이야기하면, 맹자가 그 의구심을 깨우쳐주는 내용이 많이 있지요. 상하 편 각 9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만장에 집요한 질문과 맹자의 당당한 답변을 감상할 수 있어요.
6편 : 고자
맹자가 제나라에 있으면서 벌어진 논쟁들을 담은 내용이 많아요. 맹자는 고자와 인성론에 대해서 깊이 있게 논쟁했지요. 상편은 20장, 하편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제나라의 대학자 고자뿐만 아니라 평화사상가 송경, 직하학궁의 주상이었던 순우곤과의 논쟁도 볼만해요.
7편 : 진심
맹자가 제후극을 돌아다니고 고향으로 돌아온 맹자 말년의 성숙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마지막 편입니다. 상편 46장, 하편 38장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고대 성현으로부터 이어진 유가의 사상을 공자에 이어 자신이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물씬 느껴지지요.
2. 《맹자》의 형성과 역사
공자는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유가의 학문을 정리했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어요. 돌아온 지 5년만인 73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볼 수 있지요. 공자의 어록모음인 《논어》는 공자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지요. 하지만 맹자는 62세에 돌아와 84세까지 살았으니까, 20년이 넘는 세월을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맹자는 《시경》과 《서경》 등 유가의 문헌들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제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할 시간이 있었지요. 《맹자》가 맹자 생전에 쓰여진 문헌이 분명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맹자》라는 책이 당시에는 널리 읽힌 것은 아니었어요. 특히 맹자의 뒤에 등장한 유학자인 순자는 맹자를 비판했고, 진나라가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천하를 통일했을 때, 진시황 곁에는 순자의 제자인 이사가 재상을 하고 있었지요. 그는 유가의 책을 태우고, 유학자들을 파묻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른바 분서갱유 사건이지요. 그때 실용적인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유학자들이 숭상했던 《시경》과 《서경》와 더불어, 《논어》, 《맹자》 뿐만 아니라 《순자》 등의 책도 불태워졌지요. 옛것을 숭상하고 지금을 비판하는 불온문서가 된 거지요.
진나라가 20년도 채 못 되어 망하고, 뒤를 이은 한나라에서는 유학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어요. 한나라 문제 때에는 《맹자》가 다시 부활하여 국가적으로 연구되었지만, 무제 때에는 그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어요. 무제 때 사학자인 사마천이 쓴 《사기》에도 맹자를 간략하게 취급하여 순자보다 덜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어요. 맹자에 대한 관심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후한 시대의 학자 조기가 다시 맹자를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켰어요. 그는 《맹자》를 오늘날 전해지는 형태로 정리하고, 7편을 상하로 구분하여 14편으로 나누고 260장으로 세분화했어요. 그리고 자세한 주석을 달아 《맹자》를 다시 부활시켰지요.
당나라 때에는 유학자 한유가 맹자를 높이 평가하면서 공자의 도를 계승한 마지막 학자라고 숭상했지만, 송나라 때에는 맹자에 대한 평가가 다양해요. 북송시대 때 유학자 사마광은 “맹자는 예를 모른다”며 “맹자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고요. 반면 같은 시대 구양수는 “공자의 사당에서 맹자의 제사도 같이 지내야 한다”고 칭송했지요. 주희(주자)의 스승격인 정호, 정이 형제는 맹자를 공자 이래 으뜸으로 여겼어요. 그대에 송나라 대학자인 주자는 《맹자》를 《논어》와 같은 경지로 취급하면서 《대학》, 《중용》과 함께 유학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높이 평가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서는 바로 주자가 새운 경전체계에 따른 거지요.
하지만 명나라 때에는 《맹자》가 위기에 처했어요.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은 《맹자》를 읽다가 “군주가 신하를 손과 발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배와 심장처럼 여기지만,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는 구절에서 분노하면서 《맹자》를 불태우고 ,맹자를 모시는 사당을 폐지하라고 했지요. 다행히도 신하들의 저항이 심해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불손한 부분은 잘라내고 새롭게 편찬하라고 명령을 내렸지요. 그래서 《맹자》 260장 중에서 총 88장이 삭제된 《맹자절문》이 나왔어요. 주원장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영락제가 이를 폐기해서 《맹자》 탄압은 끝났지만, 맹자의 사상은 절대왕권을 누리려고 했었던 군주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 되었어요.
이후로 원나라, 청나라를 거치면서 《맹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청나라의 4대 황제인 강희제는 맹자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썼고, 비석으로 남겼습니다. 묘비에는 “유학의 진리가 오늘에 전해지니 맹자에게 힘입은 바가 있다”며 맹자를 극찬하였습니다. 이후 청나라가 망하고, 중국이 공산화되자 유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잠시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전세계에 공자학당을 세울 정도로 유교사상에 대하여 선전하고 있지요. 《맹자》는 결국 살아남습니다.
우리나라에 《맹자》가 전해진 것은 고려말, 원나라에 지배를 받던 시기입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것은 고려말 신하였던 정몽주가 동료였던 정도전에게 《맹자》를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정도전은 이 책을 소중하게 여겨 매일 조금씩 일어가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웁니다. 그리고 역성혁명이 성공하여 조선이 건국되고나서 건국의 공로를 인정받은 정도전은 조선의 법인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온갖 제도를 마련하여 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궁궐을 짓는 등 여러 임무를 맡게 됩니다. 정도전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맹자의 정신을 조선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정도전은 《맹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임금의 전횡을 막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세우고 왕권을 견제하는 신하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태조의 아들인 이성계에게 미움을 사 결국은 죽고 말지만, 정도전이 확립한 재상 중심의 제도는 조선의 왕권과 더불어 조선조 500년 역사를 이어가는 제도가 됩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숭상했던 나라입니다. 따라서 《맹자》는 과거제도의 필수과목이 되어 선비들의 필독서가 되지요. 그리고 왕들이 잘못된 길을 걸을 때마다 왕에게 바른 정치를 하라고 주장하는 선비들의 정신 속에 《맹자》는 끝없는 원천이 되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지요.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사랑과 올바름이 정치를 펼치는 정치, 왕도정치를 펴기 위해 왕과 신하가 함께 하는 공부 등은 모두 맹자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조선은 한 마디로 맹자의 나라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역사를 보더라도 독재권력에 항거하고, 민주정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마음 속에 맹자는 살아있습니다. 4, 19항쟁, 5,18민주화운동, 86년 87년의 민주화운동에 이어, 최근에 일어난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맹자의 정신은 우리 국민의 핏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부록>
맹자 연보
맹자의 연보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청나라 사람 적자기狄子奇가 기록한 [맹자편년孟子編年]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학자마다 맹자가 각 나라를 방문하여 유세한 순서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고, 양나라 혜왕을 만난 때도 [사기]의 기록과는 다르다.
기원전 372년 4월 2일 추나라[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연주부(州府) 추현(鄒縣)]에서 태어남.
357년 노나라로 가서 자사의 문인에게 배움(15세).
332년 추나라 목공을 만남(41세).
331년 제나라 평륙에 머묾(42세).
330년 추나라에서 임나라로 감. 옥로자, 조교 등과 문답(43세).
329년 제나라 수도 임치에 감. 순우곤, 송견, 윤문 등과 교류하고 논쟁함(44세).
328년 제나라에서 고자와 변론. 광장을 사귐. 이 무렵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설이 경합함(45세).
326년 송나라로 가서 등나라의 세자를 만남(47세).
325년 추나라로 돌아옴(48세).
324년 등나라로 가서 문공에게 정전제 등을 건의(49세).
323년 농가인 진상과 논쟁을 함(50세).
322년 제나라가 등나라를 위협함. 등나라를 떠나 추나라로 돌아옴(51세).
320년 양혜왕의 초빙을 받음(53세).
318년 혜왕의 뒤를 이은 양왕에게서 실망을 느끼고 제나라로 가서 경이 됨(55세).
316년 등나라 문공의 조문을 감(57세).
315년 노나라에서 모친상을 치르고, 제나라로 돌아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연나라 공격에 관해 의견을 물음(58세).
314년 제나라가 연나라를 정복함. 제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감(59세).
312년 송나라에서 설나라로 감(61세).
311년 설나라에서 노나라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추나라로 돌아옴(62세).
290년경 제자 공손추, 만장 등과 『맹자』 편찬(83세).
289년 세상을 떠남(8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