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편지 12 : 수고했어요

2025. 4. 5.

by 김경윤

1.

탄핵선고의 날이 지났습니다. 편히 잤나요? 어제는 같이 고생한 사람들과 진하게 한 잔 하셨나요?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이곳은 같이 술 한 잔 기울일 친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서 그냥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한 번 더 시청하고 잠을 잤어요. 오랜만에 꿈 하나 꾸지 않았던 푹잠이었습니다.


2.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제주도 말로 폭싹 속았수다. 분노로 거리에서 지낸 수많은 날들과 불안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들이 뒤늦게 안도의 한숨으로 보상받네요.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첩첩산중이네요. 전국을 불태운 화마를 진화하려면 본길을 꺼야 하지만, 잔불도 확인해야 하니까요. 내란 수괴는 파면되었지만 잔당은 여전히 활개 치며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아직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듯이 천천히 하나하나 풀 수밖에 없네요.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3.

그래도 일상으로 돌아가니 참 좋네요. 어제는 탄핵선고일이기도 했지만, 가파도는 청보리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어요. 엄청 많은 관광객과 손님들이 몰려와서 정신이 없는 날이었지요. 게다가 저녁에는 송악도서관에서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인문학강의를 시작한 날이기도 했어요. 제주도민을 상대로 강의한 것이 처음이라 꽤 긴장이 되더라고요. 수천 번을 강의했지만, 이 긴장은 사라지지 않네요. 어쩌면 남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려면 어느 정도는 긴장이 필요한 가봐요. 그래도 잘 끝났어요.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았지요.


4.

지난달에는 <고양이 같이>라는 동화시집을 한 권 썼어요. 다른 작가분들과 공동창작을 하는 과정에 1차 초고가 완성된 거예요. 이 동화를 뼈대로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하는 많은 작업을 더 해야 하지만, 어쨌든 한 고비를 넘어갔네요. 그리고 청소년 소설 <노자, 가파도로 가다>도 끝이 보이는 지점까지 왔어요. 이번 달 초에는 초고를 완성해서 출판사로 보내려고요. 일하면서 쓰느라 진도가 빠르게 나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한 걸음 한 걸음 걷듯이, 한 자 한 자 써내려고요.


5.

가파도는 4월이 가장 바쁜 달이네요. 청보리 축제 기간이라 배도 엄청 증편되었고, 관광객도 3배 정도는 더 오는 것 같아요. 밥 먹을 시간도, 휴식 시간도 거의 없어요. 쪽밥을 먹고 쪽쉼을 해야 해요. 매표소 바깥에는 축제를 위한 상설시장이 열렸어요. 아침부터 대형 스피커에서 음악이 계속 흘러나와 정신이 없네요. 나이트클럽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기분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친절하게 응대하자고 다짐해요. 다들 흥성거리는 마음에 들떠 있는데, 나만 힘든 표정을 하고 있으면 안 되니까요.


6.
앞으로 60일 이내에 대선이 치러지겠지요. 대통령 한 명 새로 뽑는 것이 아니라, 내란으로 드러난 우리나라의 부실한 것들을 새로 고치는 재건의 기간이 되어야겠지요. 탄핵 이전의 120일만큼, 탄핵 이후의 120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있는 곳에서 힘껏 살아볼게요. 당신도 당신의 현장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다음번에 만나면 술 한 잔 해요. 그리고 미뤘던 이야기도 하기로 해요. 그동안 건강하고 건승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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