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복복서가, 2025)
원래 나는 '인생 사용법'이라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 있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뿐, 그리고 소로의 단언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 '단 한 번의 삶'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적기로 했다. 일단 적어놓으면 그 안에서 눈이 밝은 이들은 무엇이든 찾아내리라. 그런 마음으로 써나갔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때로 어떤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이건 이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로구나. 내겐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그런 책을 너무 일찍 쓴 것은 아닌가 두렵기도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세상으로 내보내고, 나는 또 미래의 운을 기다려야 한다. (197쪽)
1.
일생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글이 있다. 이른바 자전적 에세이.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조상에서 할아버지 대를 거쳐 부모가 등장하고, 마침내 자신에 도달하는 그 삶의 연대기는 한 번밖에 못 쓴다. 그래서 대부분 자전적 에세이는 늙어서 쓴다. 자신의 인생을 통관하며 성찰하듯 써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탐색, 이번에 김영하가 쓴 <단 한 번의 삶>이 그런 책이다. 그 탐색이 김영하식 글쓰기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그게 궁금하여 이 책을 구입하였다. (어쩌면 나도 그런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2.
읽으며 밑줄 그은 부분들.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 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102쪽, <모른다> 중에서)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137쪽,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중에서)
3.
특히 작가로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마치 기독교인들에게 "언제 구원을 받았느냐?"라고 집요하게 묻는 전도자들의 질문처럼, 독자들에게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요?"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사실 답은 없다. 있다 하더라고 많이 왜곡되고, 꾸며지고, 창작된 답이 있을 뿐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영하는 어떻게 답할까?
"가르쳤던 학생들 중 몇몇은 작가가 되었는데 그중에 내게 가능성 같은 것을 물으러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묻지 않고 그냥 썼다. 그들은 자기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쓰는 게 좋고 작가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썼을 테고, 쓰다보니 작가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도 지금은 나처럼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142~143쪽,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중에서)
4.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는 재능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작가는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작가는 '매일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부러워하는 많은 작가들처럼 재능이 없고, 쓴 책은 베스트셀러는커녕 순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지금까지 계속 쓰고 있는 '나'란 작가도 있다. 많이 쓰다 보면 '운'이 따를 수도 있다고 기대하며 쓴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운'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쓸거리가 떨어지지 않고, 쓸 수 있는 지력과 체력이 남아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이런 삶이 불행한가? 아니, 나는 그다지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행복을 만끽하며 활짝 웃어본 적도 없지만, 불행하다고 자책한 적도 없다. 그냥 쓰는 거다. 그렇게 사는 거다. 그게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