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신경림 유고시집 (창비, 2025)

by 김경윤

전파상 옆에는 국숫집이 있고 통닭집이 있고

옷 가게를 지나면 약방이 나오고 청과물상이 나온다.

내가 십년을 넘게 오간 장골목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다. 매일처럼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나니,

십년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야 보고

한달 전에 안 보이던 것이 오늘에사 보인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달려가서, 더러는

옛날 떠돌던 시골 소읍과 장거리를 서성이기도 한다.

밝은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흐려진 눈으로 새롭게 찾아내고

젊어서 듣고 만지지 못했던 것들을

어두워진 귀와 둔하고 탁해진 손으로

듣고 만지고 다시 보는 즐거움에 빠져서.


밝은 눈과 젊은 귀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흐린 눈과 늙은 귀에 비로소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끝내는 날이 될지라도.

―「소요유(逍遙遊)」 전문(18~19쪽)



1.

1935년에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2024년 5월 22일 타개한 시인이 있다. 문단계에서 '작은 거인'으로 불리던 신경림 시인이다. 그가 돌아가고 1년 후에 그의 유고 시집이 나왔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제목을 달고. 11년 만에 나온 시집이다.

내가 문학이란 용어를 처음 배울 때부터 신경림은 이미 시인이었다. 나는 그의 시집을 읽고 자랐고, 성장했고, 고생했고, 늙어갔다. 내 책상에는 그의 시집이 연대기처럼 꽂혀있었다. <농무>. <새재>, <남한강>을 읽으며 전국순례를 꿈꿨고, <가난한 사랑 노래>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고, <쓰러진 자의 꿈>을 읽으며 쓰려졌지만 일어설 수 있었다. 이후로도 그가 쓴 시집은 전작주의자처럼 사들이며 천천히 읽고 또 읽었다. 이번 시집은 생전 마지막 시집 <사진관집 이층> 이후 11년 만의 신작이자, 그의 마지막 시집이다.


2.

책에는 늙음, 병고, 죽음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그 그림자가 침울하지 않고 별처럼 환하고, 꽃처럼 밝다. 아픈 그의 시를 읽으면 아픈 곳이 치유받고, 죽음마저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서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다시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고, 만져지고, 태어난다. 젊어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늙어서는 보게 된다는 말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지만, 시인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표현으로 그려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신경림의 유고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푼푼해진다. 대한민국에 신경림 같은 시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의 언어로, 민중의 아름다움을, 사랑과 슬픔과 분노와 희망과 꿈을 별처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3.

한 달에 한 번 가파도를 떠나 고양시를 다녀오며, 서점에서 한 권 남은 이 시집을 사들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친구처럼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생전 멀리서 뵙기만 하고 술 한 잔 따라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은 이 시집을 앞에 놓고 신경림 선생님을 생각하며 술 한 잔 올려야겠다.

그의 시들을 내 목소리로 낭송하면, 지금 보다는 더 착해지고 순해지고 따뜻해지리라. 그렇게 믿고 싶다. 표제시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전문을 소개한다. 시집 제목보다 제목이 한 글자가 더 많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하늘을 훨훨 나는 솔개가 아름답고

꾸불텅꾸불텅 땅을 기는 굼벵이가 아름답다

날렵하게 초원을 달리는 사슴이 아름답고

손수레에 매달려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가는

늙은이가 아름답다


돋는 해를 향해 활짝 옷을 벗는 나팔꽃이 아름답고

햇빛이 싫어 굴속에 숨죽이는 박쥐가 아름답다


붉은 노을 동무해 지는 해가 아름답다

아직 살아 있어, 오직 살아 있어 아름답다

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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