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단편소설집 (문학동네, 2024)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그 말은 두 사람만의 농담이 되었다. 즉석밥과 계란, 반창고과 감기약, 섬유유연재와 블루투스 스피커 등을 '친한 사이' 해버렸고, '도망가면 안 친한 사이'라며 대청소 날을 정해 손가락을 걸었다. 니콜라이는 누구도 근황을 모르는 앙맨에게 '맥주 가즈아아앙'으로 끝나는 메시지를 남겼고, 진주는 일 년 넘게 업데이트가 없는 힝구의 채널에 '힝구야 안녕'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달았다. 둘 다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좋은 친한 사이 시도'였다며 서로 칭찬했다.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42~3쪽)
1.
인생을 지나치게 평범하게 보내는 것은 아니고, 별일 아닌 것을 별일처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후배 작가 나경호가 어느 날 페북을 통해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소개하는 것이 계기였을 것이다. 밀린 원고를 쓰느라 정신이 없는 나에게도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던 차, 도서관에 들렀더니 바로 그 소설책이 떡 하니 눈에 들어왔다. 나는 책을 쏙 빼들고 대출했다. 그로부터 약 1주일 정도 하루에 한 편씩 야금야금 읽었다. 나경호가 나중에 소설을 쓰면 이렇게 쓸까? 상상했다. 문체는 다르겠지만 주제 의식은 비슷할 것 같았다. 평범하다 못해 지질하기까지 한 젊은 청춘에게 건배!
2.
평범하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어쩌면 그 평범에 도달하기까지 엄청 분주한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될 때쯤, 인생의 많은 부분을 통과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도달한 평범함마저도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탄탄한 기초 위에 쌓인 평범이 아니라, 유동하는 흐름 위에 떠다니는 평범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 평범조차 이렇게 누리기 힘든 것이라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아닐지라도 바로 곁에서 서로를 안아주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친한 사이' 한 두 명쯤은 필요한 것 아닐까.
3.
김기태의 아홉 편의 소설을 읽으며,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문제의식을 펼칠 수 있구나 놀라게 된다. 젊은 작가의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넘쳐난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작품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보편 교양>이다. 특히 <보편 교양>은 인문학을 가르치는 나의 밥벌이와 묘하게 겹쳐지면서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소설 속 주인공이 했던 고민을 했을까? 그와는 다른, 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들을 했던 것 같다. "교사는 감사한 직업이고, 가끔은 아주 감사한 직업이에요. 학생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예요."라는 문장을 읽으며 씩 웃는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작품 전개에 이야기꾼 김기태를 떠오르게 된다. (작가도 아이들을 가르쳐봤나?)
4.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평론가는 김기태의 작품을 어떻게 평론할지 궁금해졌다. 이희우의 평론은 소설보다 더 어렵고 지루하게 읽혔지만 마지막에 써놓은 글은 공감이 되어 옮겨 놓는다.
소설은 위대한 정치적 선언문처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문학은 다수를 ‘단결’시키지 못하고, 적과 친구를 명확히 나누지 못한다. 다시 말해 문학은 정치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계기와 힘을 갖고 있지 않다. 평범함은 정치와 문학이 출현하는 공통의 경험적 바탕이지만 - 따라서 정치는 미학적이고, 문학은 정치적이지만 - 정치와 문학은 다른 관점에서, 다른 태도로 평범함과 관계하는 것이다. 다만 소설에서 우리는 정치적 구호와는 다른 구호를 발견한다. 이 구호의 익히 알려진 의심스러움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이 구호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 김기태가 가장 당대적인 방식으로 반복하는 그 구호는 이러하다. ‘평범한 자들이여, 들어오라.’
_이희우 해설 「평범한 자는 들어오라」에서(330~3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