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지음 (복복서가, 2024)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족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준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 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명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이 망자를 대한다. 관 속에 노잣돈이나 길동무 인형을 넣어준다. 철저한 무신론자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떼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173~174쪽)
1.
책이란 참.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러하듯 책을 만나는 것도 운명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이번에 충동적으로 구입한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가 그러하다. 나는 주중에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주말에는 탁현민의 <더 뷰티플>을 간혹 듣는다. 특히 재미있게 듣는 코너가 신동우 시인의 글쓰기 코너인데, 이번에 다룬 주제는 '여행'이었고, 거기에서 다룬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그리고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였다. 앞의 두 권은 읽어봤는데, 김영하의 책은 읽어보지 않아, 일단 마음속으로 찜해두었다. 그리고 휴일이면 자주 들르는 동네서점 서가에서 우연히 <여행의 이유>를 본 것이다. 손이 저절로 그곳으로 갔다. 무려 개정증보판이다. 무엇을 개정하고 증보하였는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요즘은 철 지난 책들을 다시 복원하며 한 두 꼭지 추가하는 것이 유행인가 보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도 그러했다. 나에게는 그냥 <여행의 이유>이다.
2.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아이스커피를 옆에 두고, 읽기 시작했다. 책은 코로나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과 작가가 되기 전, 작가가 되어 문명을 떨친 후 여행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수차례 이사를 가는 여행(?)부터 일 년 한 두 번 무작정 떠나는 여행, 학창 시절의 중국여행, 작품을 쓰기 위해 중국 여행을 갔다가 추방된 이야기, 그리고 알쓸신잡을 하며 여행을 했던 이야기와 고전에 해당하는 <오뒷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의 여행,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여행 이야기까지 다양한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술술술 잘 읽혔다. 김영하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충분히 느껴졌다. 화제가 바뀌어도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는 재주가 있어 덜커덕거리지 않았다. 자신의 여행 경험과 독서 여행의 경험을 글쓰기의 능력으로 천의무봉으로 이어 붙여 한 편의 글이 완성되고 있었다. 간혹 만나는 명문은 일종의 느낌표처럼 여행의 의미를 음미하게 했다.
"갇힌 자들에게 책은 세계와 역사로 향하는 문이었고, 언제나 조용히 열려 있었다."(23쪽)
"여행은 질병과 혐오가 없는 안전한 세계를 필요로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아직도 서로에 대해 환대가 가능한 공간임을 증거하는 행위였다." (23쪽)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으로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38쪽)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44~45쪽)
"소설 쓰기는 나에게 여행이고, (비록 내가 창조했지만) 낯선 세계와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88쪽)
"발상은 무게가 없다. 지혜도 그렇다. 기술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런 무형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먹고 살기에도 유리했다." (104쪽)
3.
김영하의 여행은 하루이틀의 여행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역마살과 같은 여행이다. 그는 정처를 정해놓지 않았기에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고, 그곳이 내면세계이든 독서 세계이든 이국적인 영토 세계이든 유랑을 잘 해낼 준비가 되어 있어 보였다. 나처럼 붙박이 인생은 상상하지도 못한 여행을 하는 그가 놀랍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여행도 팔자인가?
내가 주로 떠나는 여행은 책 속으로의 여행이거나, 창작의 여행이어서 장소 이동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방 안에 앉아 있어도 천리를 볼 수 있는 노자의 능력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움직이지 않고 떠나는 훈련을 평생 한 셈이다. 이 또한 행복한 여행일까?
4.
김영하가 여행의 조건으로 손꼽은 것은 '환대'이다. 처음 길게 인용한 글이 그에 대한 글이다. 우리는 낯선 곳에 태어나 부모와 주변인의 환대를 받았고,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가면서도 끝없는 환대의 고리가 없었다면 삶은 참으로 무섭고 팍팍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도 남을 받아들이고 친해지고 도움을 주는 환대의 시간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낯선 곳에 가서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안도감,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누군가 작은 도움의 손길을 줄 거라는 기대감, 그래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더라도 공포보다는 호기심을 더 발동시킬 수 있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