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벨리 저 (쌤엔파커스, 2023)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며, 그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는, 빛으로 가득한 이 마법의 만화경.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연약한 베일은 바로 이 무한한 신비를 탐색하기 위한 서투른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손에 든 지도를 믿고 의심 없이 세계를 건널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충분히 잘 살 수 있고요. 세계의 빛과 무한한 아름다움에 그저 압도된 채로 말없이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참을성 있게 책상 앞에 앉아 촛불을 켜고 노트북을 열고, 실험실에 가서 친구나 논적과 논쟁을 벌이고, 성스러운 섬에 틀어박혀 계산을 하고, 새벽녘에 바위산을 기어오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차를 마시고 벽난로 불을 지피고 다시 자판을 두드리면서 몇 가지를 조금 더 이해하고, 기존의 해도를 집어 들어 그 한 부분이라도 더 낫게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탤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자연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죠. (141쪽)
1.
최근에 노벨리의 저서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일반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이 물리학자의 글쓰기는 그 어려운 현대과학의 세계를 대중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합니다. 나같이 과학의 세계 - 그것도 고전물리학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세계 -에 문외한인 사람조차도 흠뻑 빠지게 만들 정도로 로벨리의 글은 매력적입니다.
그의 글은 과학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어려운 이론적 문제를 설명하기보다는 과학적인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 - 다른 혁명적인 과학자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 를 진솔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어려운 문턱을 없앱니다. 벽돌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감으로 벽을 완성하듯 그렇게 차례차례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과학의 세계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재주라면 재주입니다.
2.
이번에 읽은 책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책에서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 이론을 이야기합니다. 로벨리의 이야기는 강한 바람이 부는 척박한 북해의 섬, 헬골란트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책의 원제가 '헬골란드 섬'임을 알게 됩니다.) 이 섬에서 젊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역학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안합니다. 이후로 이 양자론이 탄생하고, 혼란을 빚고, 다양한 해석을 통해 발전해 가는지 추적하게 되지요.
말로만 듣던 중첩, 불확정성, 양자, 얽힘, 유한하면서 무궁무진한 정보, 실체 없는 자연주의 등의 개념을 물 흐르듯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5장 보그다노프와 레닌을 거쳐, 나가르주나(용수)의 '중론'에 도달하면 이 물리학자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력, 그리고 그 치열함이 어디까지 촉수를 뻗고 있는지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게 됩니다.
3.
"나가르주나의 핵심 논지를 간단히 말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바로 양자역학과 공명을 일으킵니다. 물론 나가르주나는 양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알 수도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이 세상에 대한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제공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용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가 제시하는 관점에 도움을 받으며, 우리가 양자 세계에 대해 좀 더 쉽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77쪽)
이전에 읽는 저술에서는 장자를 이야기하더니, 이제는 나가르주나를 이야기하네요. 내가 흥미로워한 부분이니 조금 더 인용할게요.
"많은 철학과 과학이 그러하듯 나가르주나는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합니다 즉, 관점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관습적인 외관적 현실과, 궁극적인 실재의 구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구분을 뜻밖의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궁극적인 실재, 본질이 부재, 공이라는 것입니다. 없다는 것이죠.
모든 형이상학이 모든 것이 의존하는 본질, 모든 것이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올 수 있는 시작점인 제1실체를 찾는다면, 나가르주나는 궁극적 실체, 시작점은... 없다고 말합니다."(179쪽)
이 물리학자가 나가르주나의 저술을 주석과 함께 정성껏 읽으며 도달한 지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로벨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철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입니다. 미천한 기계공이죠. 나가르주나는 양자를 다루는 이 미천한 기계공에게, 물리적 대상이 그 발현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무언인지 반드시 묻지 않고서도 물리적 대상의 발현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도 나가르주나의 공空은 깊은 위안을 주는 윤리적 태도를 길러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립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무상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인 나에게 나가르주나는 세상의 평온함과 가벼움, 아름다움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미지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실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얇고 연약한 베일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183~4쪽)
4.
인용이 길었네요. 어느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책 제목인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어쩌면 로벨리의 생각을 뒤집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로벨리의 세계는 주체와 대상이 확연하게 구분되고, 모든 인식의 진위가 나에게 귀결되는 칸트의 주체주의적 자아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바로 나와 너의 관계에서 맺어진 그물망의 흔적이 나에게 맺혀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미지의 이미지일 뿐인 나, 그리고 그 모든 나로 만들어진 세상,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하고 가볍게 세상은 존재합니다. 나 없이도 존재하겠지만. 나로 인해 더욱 아름답게 존재하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