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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안상학 시집 (걷는사람, 2020)

by 김경윤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만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 <몽골에서 쓰는 편지> 전문




1.

안상학 시인(나는 형이라 부른다)이 가파도에서 3개월간 머물다가 갔다. 제주문화재단의 초청으로 가파도 AiR에 머물며 창작을 했다. 가파도에 머무는 동안 형과 더불어 문우도 만나고 행사도 참여하고 술도 마시고 친하게 지냈는데, 막상 형이 가파도를 떠나는 날에는 나도 가파도에서 떠나 있어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며칠 지나 가파도로 돌아오니 나에게 빌려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제주 편>과 안상학 형이 직접 쓴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권이 근무처 책상머리에 놓여있었다. 대신 근무를 한 직원에게 맡기고 간 것이었다. 시집에 뭐라도 끄적여 줄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아무 말도 없다. (급하게 떠난 모양이다.^^)


2.

하룻밤이 지나고 시집 읽기 좋은 일요일에 상학이 형이 쓴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을 읽는다. 형은 떠나고 시집은 내 곁에 있다. (형의 시집을 언제 읽어보았던가? 생각해 보니 가물가물하다.) 낯선 시인의 시집을 읽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한 편 한 편 읽었다. 시집에는 형의 생애가 있고, 사랑이 있고, 아픔이 있고, 이별이 있고, 고통이 있고, 연대가 있다. 행간을 읽으며 나의 생애와 겹쳐본다. 가난했던 삶이 겹쳐지고, 힘겨웠던 가족관계가 겹쳐지고, 많은 슬픔들이 겹쳐진다. 이렇게 생의 싱크로율의 높아지면 형이 쓴 시들이 내가 쓴 것처럼 읽힌다. (병이다.)


3.

잘 돌아가셨겠지. (글을 쓰고 안부전화라도 해야겠다.) 형의 많은 시들의 시선이 과거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늙음과 병과 죽음을 생각했다. 위에 인용한 시도 '싶었습니다'로 문장들이 끝난다. 기실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 쓴 편지일까? 자신에게? 당신에게? 당신은 누구일까? 이런 헛된 질문을 하며 시를 읽는다.


"내 여기 올 때처럼, 내 돌아갈 길 또한 여러 개의 문이 열리고 닫히고를 반복하며 이어질 것이다. 끝내는 어떤 담장 안으로 문 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거기서는 다시금 몸과 마음의 거리가 차츰 멀어지는 것을 겪게 될 것이다. 하늘이 좁아지는지도 모르게 살아갈 것이다. // 비어 있는 곳으로 몸이 옮겨갈 수 있듯이 비어 있는 곳으로 마음이 옮겨가는 여기, 비어 있는 곳을 확실하게 채워가며 바람이 불어간다, 불어온다." (52~3쪽)

- <고비> 중에서


문우들과 몽골여행을 갔나 보다. 그 여행이 이끈 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형의 가파도(제주도) 여행은 어땠을까? 어떤 시를 남겼을까?


4.

마음에 대한 시를 많이 쓴 것을 보면, 형이 어지간히 마음의 갈피를 못 잡았나 보다. 그러다가 도달한 안상학 시의 <마음의 방향>을 여기에 적어 놓는다. 이 마음에 내 마음을 얹는다.


마음이 몸 안에서 쫓아나가지 않도록 잘 간직할 것


삶이 깊은 바다에 이를수록 고독한 것은 당연하다

고독이 고독하지 않도록

마음의 방향을 내 안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할 것


높은 봉우리에 오를수록 고독한 것은 당연하다

고독이 비참하지 않도록

마음의 방향을 항상 내 안의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것


아무리 높고 깊더라도

마음이 절대 내 안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속할 것 내 안이 우주라고 생각할 것


사랑하라 그렇더라도 지그시 바라만 볼 것

사랑하라 그렇더라도 우두커니 지켜만 볼 것


아픈 것은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

머리가 빠개지는 듯 명치를 도려내는 듯

온몸이 부서지고 흩어지는 듯 고통스럽더라도

절대 마음을 몸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두어 놓고 살아야 한다

내 몸은 내 몸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없으니

내 몸은 내 몸을 품어 줄 수도 없으니

몸속 가장 먼 마음에라도 기대며 살이야 한다

그래도 마음이 몸과 한통속일 때 가장 자유로운 법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손끝으로 달아나려는 마음을

최후까지 불러들여 주저앉혀라 가라앉혀라

달아나는 파도를 끝끝내 불러들이는 수평선처럼


<추신>

아, 안상학이 가파도에 친필로 써놓은 시가 있었지. 글씨 하나는 기깔나게 쓰는 형!


안상학 가파도 시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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