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2025)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기반한 사회는 거대한 '죽음의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급여와는 상관없다. (225쪽)
1.
"2016년 3월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벌인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결과는 알파고의 4 대 1 승리였다. 4국에서 이세돌 9단이 거든 승리는 인간이 알파고를 상대로 마지막으로 거둔 승리가 되었다."(17쪽) 이 세돌 9단은 알파고와 대결 후 바둑계를 은퇴했다. "나는 전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고 어떤 혼란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어떻게 적응했고 그 적응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보급되면 소설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봤다."(25쪽)
그러니까 이번에 읽은 장강명의 르포르타주 <먼저 온 미래>는 AI와 벌인 세기의 대결 이후에 벌어진 바둑계의 충격과 반응과 대응을 담담하게 전문인터뷰를 통해 그러낸 작품이다. 부제는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장강명은 느닷없이 침투해 온 AI가 인간의 생각과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가장 충격파가 심했던 한국 바둑계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리고 확대하여 문학계를 상상한다. 이미 AI는 문학과 예술 세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AI 스스로가 만든 미술, 음악, 문학작품이 팔리기도 한다. 만약에 바둑계를 알파고가 평정했듯이, 문학계를 AI가 평정한다면? 작가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2.
챗GPT가 나왔을 때, 그동안 검색창을 통해 검색을 주로 해왔던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이제 단순히 검색만 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기획도, 글쓰기도, 자유롭게 그림 그리기도, 영상이나 음향 제작도 가능한 신세계가 열렸다. 한 원로작가는 박사학위를 받은 비서를 10명쯤 둔 것 같다고 그 사용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나는 원로작가는커녕 작가 대열의 말석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라 챗GPT를 소가 닭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에게 정말 놀라운 세계이니 꼭 경험해 보라는 충고를 듣고, 이제야 상견례를 마치고 서로 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알아봤고,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혜가 필요했다. 그때 마침 장강명의 작품이 나온 것이다. 이 아니 반가울쏘냐. 장강명이 AI가 만들어놓은 세계, AI로 변화되거나 훼손되거나 사라져 버린 세계를 관찰하고 진단한다. 그가 무엇보다 걱정하는 것은 AI로 인해 변해버린, 또는 사라질 위험성에 놓여 있는 가치이다. 그동안 인류를 가치를 중심에 놓고 기술을 개발해 왔는데, 이제는 기술이 가치를 압도하는 세계에 봉착한 것이다. 그것도 기술은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장강명은 이 가치의 문제에 주목한다.
"가치가 기술을 이끌지 못하고 기술이 가치를 훼손하는 현상은, 기술이 개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우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은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말하며 과학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논의를 피한다. 기술자들은 기술은 도구일 뿐이며, 쓰는 사람이 그 용도를 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틀렸다. 기술은 하나의 사상이다. 흔히 칼이 요리사의 손에 들어가면 조리 도구가 되고, 강도의 손에 들어가면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은 오히려 예외적인 기술이다. 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뿐이다. 사람을 쏘거나, 사람을 쏘겠다고 위협하는 것. 총에 장식적 가치가 있다 해도 그것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물건이라는 상징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칼 중에서도 일본도 같은 칼로 요리를 할 수는 없다. 과연 쓰는 사람이 기술의 용도를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도의 용도는 일본도를 만든 장인이 거의 정한 것 아닐까? 우리는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헛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물질세계뿐 아니라 정신세계 깊은 곳까지 힘을 미치는 강력한 권력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나 정당, 제도가 그런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반드시 견제 장치가 마련될 것이다." (304쪽)
3.
책이 종반전으로 갈수록 바둑계의 이야기는 줄어들고 인간 전반적인 삶의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그렇지만 그 기술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거의 없는 현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지상주의자들의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혀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다가 결국 기술의 노예로 전락할 것인가? 편의만을 추구하다가 지배당하고 종속당하는 상태에 놓여있어도 괜찮은가? 우리의 미래는 어떤 가치가 담긴 삶을 살아야 하는가? 또는 살고 싶은가? 어쩌면 장강명이 바라는 세상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다. 하지만 그 세상으로 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 길은 험난할 것이다. 나는 장강명이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다음 시대의 탈것이 전기차가 아니라 자전거가 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지금의 자동차 전용도로처럼 넓게 깔고, 자전거 수리점을 현재의 주유소처럼 곳곳에 설치하고, 자전거 데이트를 섹시한 일로 만들고, 도시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데 그런 기술이 더 적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그냥 개인적인 추정일 따름이다. 내 믿음이 옳다면 해야 할 과제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상상은 하고 싶다. 그 상상을 믿고, 그 상상에 힘을 싣고, 그 상상에서 힘을 얻고 싶다. 그것이 가치가 기술을 이끈다는 말이 뜻하는 바다." (305~6쪽)
4.
총 10부로 구성된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마지막 10부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일'을 읽을 때에는 사뭇 긴장감이 감돌았다. 끝에 가서 용두사미가 되는 작품이 아니라 잘 빌드업된 작품을 보는 기분이 상쾌하다. 보통 12시쯤에는 잠에 드는데, 이 책을 읽느라 새벽 2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읽었다가 생각이 많아진 작품이다. 이런 책이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