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지음(글항아리, 2024)
독자는 문장으로 적힌 지옥의 창문을 열어보면서 자유의 물결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 편협한 생각, 작가에 대한 권능자의 질투와 조바심이 금서를 만든다. 금서의 작가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힘썼던 초극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안전하지 못한 책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었다. 금서를 읽으며 여행하는 일은 곤경에 처했던 책들의 광휘 가득한 복권이다. 금서를 선택하여 읽는다는 것은 잊힐 뻔했던 인류의 가치와 미래 지향적인 진의를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독자讀者적 행위다. 독자는 망각의 물결에서 의식적으로 책의 불온함을 제거해 준다. 이 위대한 일은 독자만이 해낼 수 있는 과업이다.(15쪽)
1.
내가 젊었을 때는 금지된 책들이 많았다. 국가에 의해 금지된 책들은 오히려 어둠의 경로를 통해 더욱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누군가가 금서를 읽었다거나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금지된 인간'의 대열에 들어갔음의 징표가 되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에 걸려 체포되기 직전에 경찰들은 우리 집에 들이닥쳐 집에 있는 컴퓨터와 다량의 책들을 압수수색해 갔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체포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금지될 만한 책들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컴퓨터에 있는 불온(?)한 문서들도 삭제했다. 당시 나는 합법적 청년단체의 간부였다. 그로 인해 적당량(?) 구치소에 있다가 세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풀려나왔다.
2.
내가 읽은 김유태가 쓴 《나쁜 책》은 바로 인류역사상 다양한 형태로 금지된 목록에 오른 문학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인류가 저지른 감추어진 만행을 폭로하거나, 상상하기조차 힘든 행동을 노골적으로 모사함으로 인간의 추문을 드러내는 일을 용감하게 글로 남긴 작가들과 작품의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이로 인해 어떤 작가들은 지금도 테러의 대상이 되거나, 심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거나, 고국을 떠나 지금도 망명생활을 하기도 한다. 금서는 지금도 넘쳐나고 있다.
3.
한때 나도 한 번 금서를 써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픈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금서를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과 불화함을 감당할 용기와 스스로의 삶을 위험에 빠뜨려도 괜찮다는 강한 정신에 소유자여야 한다. 게다가 정의에 대한 남다른 안목과 진실을 파헤치는 지독한 끈기도 있어야 한다. 거기에 중간에 멈추거나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써낼 수 있는 필력도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금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이번에 《나쁜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통렬히 확인한다.
4.
《나쁜 책》에서 소개하는 금서를 읽으며 내가 금서에 얼마나 무뢰한인지 깨닫는다. 그 많은 책들 중에 내가 읽은 책은 다섯 손가락에도 꼽히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생경한 작가의 낯선 작품들이다. 내가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몇몇 작품은 메모에 남겨 꼭 읽기로 한다.)
첫 글에도 인용했듯이 금서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독자다.
아무리 위대한(?) 책이라도 독자의 손에 들어가 펼쳐지지 않는다면, 뇌관이 빠져버린 다이너마이트와 같다. 위험하지만 전혀 위험성이 감지되지 않은 채로 지금도 도서관이나 책방에 고이 꽂혀 있는 책들은 지금도 눈 밝은 독자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번에 쉬는 날이 돌아오면 도서관에 가서 먼지 쌓인 금서의 봉인을 풀어야겠다. 그리고 금서의 뇌관에 눈빛으로 불을 붙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