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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사생활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사이, 2024)

by 김경윤

내 경력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건강, 감정, 트라우마 경험의 특징 등을 연구했다. 그러다 1980년대 초반, 나는 우연히 발견한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지독한 트라우마 경험을 혼자서만 간직하는 사람들은 그 경험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상의 문제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왜 그리 해로울까? 더 중요한 질문을 하자면,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는 비밀을 터놓는 사람들은 더 건강해지는 것일까? 나와 제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금세 알게 되었다. 답은 <그렇다>였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루 15분에서 20분 정도씩 사나흘 연속으로 자신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 글을 써보라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했던 사람들에 비해 건강이 호전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이후의 연구들에서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적 글쓰기 expressive writing가 면역 기능을 높이고, 혈압을 낮추며, 우울한 감정을 줄이는 한편 평소의 기분도 더 나아지게 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최초의 글쓰기 실험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전역에서 2백 건 이상의 비슷한 실험이 수행되었다. 연구 결과는 그리 대단치 않을 때도 많지만, 감정의 격변을 <언어로 변환>하는 단순한 과정은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과 꾸준히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6쪽)


1.

송악도서관에 가는 것은 빌리고자 하는 책을 대출하러 가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정해진 책만 달랑 대출하고 나오지는 않는다. 내 관심사와 필요와 상관없이 요즘에는 무슨 책들이 나오는지 구경하는 맛도 제법 쏠쏠하다. 그렇게 구경하다가 빌린 책이 언어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가 쓴 <단어의 사생활>이다.

"현재 텍사스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가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연설과 기자회견은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이메일, 블로그, 인터넷 게시글, SNS, 자기소개글, 대입 논술, 다양한 문학작품과 영화 등에 사용된 단어를 분석해 단어와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의 심리적 연관성에 대해 분석한, 일종의 <단어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사람들이 쓰는 말과 글에는 고유한 '언어의 지문'이 새겨져 있어, 그 사람의 정체성과 성격, 지위와 성향, 처지와 상태, 타인과의 관계와 미래의 행동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이라면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2.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가파도에 홀로 살면서 생긴 온갖 불안하고 초초하고 낙담했던 상태를 그대로 버티고 견디며 살아온 것보다, 그때그때 말과 글로 표현하며 살았던 것이 나의 건강 비결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표현적 글쓰기'를 통한 자기 치유 기능의 덕을 나는 그동안 톡톡이 보고 산 셈이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지인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나 우울을 글을 씀으로 자가 치유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내 글을 다시 언어 심리학적 차원에서 분석하면서 보는 재미도 흥미진진하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작가들의 표현적 글을 보면서 그들의 심리상태를 유추해 보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언어 심리학은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듯하다.


3.

아직 다 읽지 않아. 뭐라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읽을수록 '그렇군' 끄덕이는 대목이 많았고, '정말'하며 놀라는 대목도 있었다.


"여러 종류의 기능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동안 유독 중요하게 눈에 띄는 단어군이 있었다. 바로 인칭대명사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인칭 대명서(우리, 당신, 당신들, 그들)에 비해 1인칭 단수 대명사(나는, 제가, 나의, 저의, 나를, 저를 등)의 사용 빈도가 많이 변할수록 글쓴이의 건강이 더 좋아졌다."(33~34쪽)


"글쓰기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보다 더 낙관적인 경향을 표출하고, 부정적인 사건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경험으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구성하고, 관점을 전환할 수 있다." (35쪽)


(....)


4.

책을 읽으며 느끼는 거지만 대부분의 성격은 어휘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쓰는 지시어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나'라는 말을 문장에 많이 드러내는 사람은 지위가 낮거나 감성적인 사람일 경우가 많다. 대신 '우리'나 '너'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지위가 높거나 뭔가 촉구하거나 지시하는 사람이 많다. 사장이나 리더나 정치가들이 주로 쓰는 어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 지위가 낮은 사람에 계속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학문적으로 확인하니 뒷맛이 씁쓸하다.


5.

책의 사례들은 대부분 미국적 이어서 한국적 사례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사뭇 궁금하다. 누군가 하려나? 전문가의 분발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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