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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창비시선 500 기념 시선집

by 김경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백무산, <정지의 힘> 전문



1.

주말이면 시집을 읽는다. 내가 치르는 예식과 같은 것. 지치고 힘든 산문적 삶에 가끔은 춤추듯 리듬을 실어 생기를 넣고 싶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고, 무더위를 식히는 비람처럼 삶에 숨을 불어넣어주고 싶다. 시와 춤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예술적 몸짓. 시를 읽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눈이 맑아진다.


2.

오늘 읽는 시집은 창비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다.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목련 피는 계절, 이대흠의 시의 마지막 행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를 제목이 인용한 창비시선 500번 기념 시선이 출간되었다. 401번으로 1948년생 시인 김용택의 <울고 들어온 너에게>(2016)가, 499번으로 2000년생 시인 한재범의 <웃긴 게 뭔지 아세요>(2024)가 출간된 것처럼 창비 시선의 400번 시대는 한국시의 현재와 미래가 어우러지는 시기였음을 엮은이 안희연, 황인찬은 주목한다. 401번에서 499번까지 이름을 올린 시인들의 시 중 한 편씩만 골라 현재적으로 어우러지는 시 90편을 물 흐르듯 엮었다."

비록 한편 씩이지만 창비시선 401번부터 499편에 등장하는 시인의 백미를 맛보는 재미가 있다. 나랑 친한 시인도 보이고, 내가 아는 시인도 보이고, 이번에야 처음 알게 된 시인들도 많다. 진수성찬이다.


3.

처음에 소개한 시는 백무산의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에 수록된 <정지의 힘>이다. 이 시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노자 철학의 핵심을 한 작품으로 응축하면 이 시가 될 것이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본주의 문명을 촌철살인의 힘으로 멈추게 하는 백미다. 달리기보다 중요한 것이 멈추기임을 나이가 들면서 절감한다. 가파도의 생활은 멈추기의 훈련 같다. 이제는 몸뿐만 아니라 질주하던 마음도 저속운전할 있게 되었다.


4.

이시영 시인의 <그네> 또한 절창이다.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딱 두 줄이다. 선경후정의 현대시다. 세월이 흐를수록 현란한 비유와 상징보다 투명한 이미지와 직관적 통찰에 마음이 끌린다


5.

또는 정호승 시인의 <집을 떠나며>의 첫 연과 마지막 연. "빈집이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난다/ 빈집을 떠나야 내가 빈집이 되므로/ 빈집이 되어야 내가 인간이 되므로/ 집을 떠나면서 나는 울지 않는다"로 시작하여 "나의 빈집에는 이제 어머니도 나도 없다/ 나의 빈집은 바람이고 구름이다/ 집을 떠나며 내 목숨의 그림자도/ 나를 떠난 지 이미 오래다"로 끝나는 시를 읽으며 동기화된다. 투명해진다.


6.

시집을 읽는 시간. 나는 무더위도 잊은 채, 영혼의 그늘 속에 숨어들어 쉬고 있다. 시집은 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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