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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윤리

이권우 저 (어크로스, 2025)

by 김경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후 우리 지성을 점령한 포스트모던 철학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것은 지적 화려함을 자랑하는 은하수일 수 있을지언정 갈 길을 비추어주는 별은 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게걸스럽게 읽어나갔지만, 루카치가 준 충격은 다시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배 교수가 갈고닦아 보여준 <맹자>는 내 칠흑 같은 영혼에 다시 떠오른 별이었다. (...)

내가 배(병삼) 교수 덕분에 알게 된 맹자라는 별로 당신을 환히 비추고 싶어 이 책을 썼다. 더 깊이 맹자를 읽고 싶다면 배병삼의 <맹자, 마음의 정치학>(전 3권, 사계절)을 읽어보길 권한다. 당신에게도 갈 길을 일러주는 별이 되리라 믿는다. (249, 250쪽)





1. 오랜만에 고양시에 올라간 김에 같이 북토크를 진행했던 이권우의 신간 <최소한의 윤리>를 한양문고에서 구입했다. 지역서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가파도로 내려와 이 책을 이틀 만에 읽었다. 술술 읽혔다. 분명 문어체인데 구어체처럼 다가왔다. 이권우가 내 앞에서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았다. 과장을 보태자면 이권우의 문장은 천의무봉天衣無縫처럼 매끄럽다. 생각을 장악하여 전체를 조망하는 자가 지금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을 때 쓸 수 있는 경지다.


2.

위에 인용했듯이, 이 책은 우정의 책이다. 배병삼의 <맹자>를 읽고 감동하고, 독서평론가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널리 전하고픈 욕망을 뒤에 고스란히 담았다. 일찍이 배병삼의 <맹자> 3권을 읽고 나 역시 적잖이 감동했지만, 이권우처럼 이렇게 노골적으로 헌사를 쓰듯, 책을 쓰지 못했다. 둘의 우정(?)이 깊구나 싶다. 부디 이권우의 소망처럼 이 책들 읽는 독자들이 배병삼의 <맹자>도 구입하여 읽기를 기대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가치는 충분하다. 소장가치뿐 아니라 독서가치도!


3.

이권우의 독서는 참으로 치열하다. 슬쩍슬쩍 책을 읽고 인상비평을 하는 평론가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한 권의 책을 평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책들을 교차하여 독서한다. 그의 글은 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경합을 벌이듯 등장한다. 그중에 한 대목만 골라서 여러분에게 이권우의 문체를 감상하라고 소개한다. 이 짧은 글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 푸코의 <광기와 역사>와 <감시와 처벌>이, 신영복의 <담론>이,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강상중의 나스메 소세키가, 종횡무진 등장한다. 지식 과시가 아니라 통찰이다. 이런 문장이 수두룩하게 이권우의 책에 담겨있다. 진수성찬이다!


"신영복은 존재론이 유럽 근대사의 특징이라 했다. 이 말은 근대 이후 동서양 전체가 존재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바꾸어야 한다. 근대는 자본의 무한한 자기 증식을 특징을 특징으로 한다. 자연과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계 맺은 중세적 인간을 개인화, 원자화한 것은 자본의 요구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인간은 본토와 아비의 집을 떠나(거주 이전의 자유) 세습된 농노라는 신분에서 노동자로 전환(직업 선택의 자유)했다. 자본주의의 계급관계는 자연과 전통, 혈연과 맺은 관계성의 파괴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근대성은 관계론적 존재를 존재론적 존재로 바꾸는 과정이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은 개인화, 원자화된 인간을 훈육과 규율을 통해 자본이 원하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바꾸는 과정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자연과 공동체와 맺은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요즘 자주 잎에 오르는 '코먼스 commons'라는 개념처럼, 공공의 것(땅, 강, 숲)이 상품이 되어 버린다. 또 하나는 불안이 엄습하게 된다. 관계론적 존재는 전통적인 가치를 삶의 좌표로 삼았다. 어떻게 살아갈지 예측 가능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말했듯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행복한 시대였다. 하지만 근대적 개인이 탄생하면서, 루카치의 말을 비틀면, 가야 할 길을 비춰주던 별이 사라졌다.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이 나쓰메 소세키를 들어 반복적으로 말하는, 자의식의 과잉에 따른 불안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원시유학에 다시 관점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명확해진다. 존재론의 폐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관계론을 비판적으로 복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신영복이 동양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맹자>에 나온 인륜을 현대적 관점에서 해체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배타적 독립성과 개별적 정체성의 철학에서 벗어나 오늘에 걸맞은 관계론의 철학을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무한 욕망을 부추기는 존재론의 시대를 끝장내고, 관계론의 세상을 다시 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아니면, 우리는 여섯 번째 멸종의 장본인이 되고 말 운명이다. 이제, 맹자에 나온 인륜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관계성의 미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자. 새롭게 구성한 인륜이야말로 파국적 위기에 놓인 나와 국가, 그리고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비상구이다." (131~133쪽)


4.

최근에 이권우가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건강해졌으리라 기대한다. 우리 나이쯤 되면 아픈 것이 기본이지만,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권우의 글을 읽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니까, 우선은 이권우가 건강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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