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1848년 혁명 관련 글들

- 혁명의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

by 김경윤

저술의 배경과 마르크스의 삶

1848년 2월 24일, 파리에서 혁명이 터졌어요. 루이 필리프 왕이 왕좌에서 쫓겨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거든요. 이 소식이 유럽 전체에 번개처럼 퍼져나갔어요. 마치 『공산당 선언』의 예언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죠.

브뤼셀에 있던 30살의 마르크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어요. 드디어 이론이 현실이 될 때가 온 것 같았거든요. 마르크스는 즉시 행동에 나섰어요.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 6,000프랑을 모두 혁명 자금으로 내놓았어요. 그리고 벨기에에 있던 독일인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벨기에 정부는 마르크스의 활동을 위험하게 봤어요. 3월 3일, 경찰이 마르크스의 집에 들이닥쳤어요. "24시간 내에 벨기에를 떠나라"는 추방 명령이었죠.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 딸들과 함께 급히 짐을 쌌어요. 예니는 임신 중이었는데도 말이에요.

마르크스 일가족은 파리로 향했어요. 파리에서는 임시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사회주의자들도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어요.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독일인 혁명가들과 만났어요. 이들은 독일에서도 혁명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신중했어요. 독일의 상황이 프랑스와는 다르다고 봤거든요. 독일은 아직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봉건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르크스는 우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4월,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독일로 돌아갔어요. 목적지는 쾰른이었어요. 쾰른은 라인 지역의 중심 도시였고, 마르크스가 예전에 『라인 신문』을 발행했던 곳이기도 했어요. 마르크스는 여기서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심했어요.

『새 라인 신문』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부제는 '민주주의 기관'이었죠.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독일 혁명을 지도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자금 조달이 쉽지 않았어요. 마르크스는 자신의 유산을 모두 털어넣었고, 예니도 자신의 보석을 팔았어요.

『새 라인 신문』은 1848년 6월 1일 창간되었어요. 마르크스가 편집장을 맡았고, 엥겔스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기자로 참여했어요. 이 신문은 독일에서 가장 급진적인 신문이었어요. 왕정을 비판하고, 공화정을 지지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했거든요.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1848년 혁명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했어요. 파리의 6월 봉기, 빈의 10월 혁명, 베를린의 3월 혁명 등을 자세히 분석했죠. 특히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혁명을 해석한 것이 특징이었어요.

하지만 혁명은 마르크스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어요.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과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동 세력과 타협하기 시작한 거예요. 특히 파리에서 일어난 6월 봉기가 진압된 후, 유럽 전체의 혁명 분위기가 급속히 식어갔어요.

마르크스는 이런 상황을 날카롭게 분석했어요.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혁명을 배신했다고 비판했죠. 『새 라인 신문』의 논조도 점점 더 급진적이 되어갔어요. 결국 프로이센 정부는 이 신문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1849년 5월, 『새 라인 신문』은 결국 폐간되었어요. 마지막 호는 빨간 잉크로 인쇄되었어요. 마르크스의 작별 인사였죠. "우리는 떠나지만, 우리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어디서나 노동계급의 해방이다!"

마르크스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어요. 이번에는 런던이었어요. 그곳에서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경험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혁명이 왜 실패했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분석한 거죠.


저술의 핵심 내용 정리

마르크스의 1848년 혁명 관련 글들은 주로 『새 라인 신문』에 실린 기사들과 나중에 런던에서 쓴 분석 글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글들의 가장 큰 특징은 혁명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분석했다는 점이에요.


파리 6월 봉기 분석

1848년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노동자 봉기는 마르크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이 봉기는 2월 혁명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거든요. 2월 혁명은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함께 왕정을 타도한 것이었지만, 6월 봉기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에 맞서 일으킨 것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이를 "현대사 최초의 위대한 전투"라고 불렀어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직접 맞붙은 첫 번째 계급전쟁이라는 뜻이었죠. 봉기의 원인은 임시정부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려고 한 것이었어요. 국립작업장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제도였는데, 부르주아들이 이를 부담스러워한 거예요.

마르크스는 이 봉기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어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죠. 부르주아들은 정치적 자유만 원했지만, 노동자들은 경제적 평등도 원했어요. 이 차이 때문에 연합이 깨진 거였어요.

"6월 봉기는 부르주아 공화국의 추악한 비밀을 폭로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계급 지배를 공공연히 선포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분석했어요. 공화국이라고 해서 모든 계급에게 평등한 것은 아니라는 거였죠.


독일 혁명의 특수성

독일에서 일어난 1848년 혁명은 프랑스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어요. 독일은 아직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고, 각 지역마다 다른 정치 체제를 갖고 있었거든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등 여러 왕국들로 나뉘어 있었어요.

마르크스는 독일 혁명의 과제를 두 가지로 봤어요. 첫째는 민족 통일, 둘째는 민주주의 실현이었죠. 하지만 독일 부르주아들은 이 두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노동자들의 급진적 요구를 두려워해서 기존 권력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거든요.

특히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했어요. 이 의회는 독일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말만 많고 행동은 없었어요. 마르크스는 이를 "교수들의 의회"라고 조롱했어요. 지식인들이 모여서 이론만 늘어놓고 실천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죠.


부르주아의 배신

마르크스가 1848년 혁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부르주아의 배신'이었어요. 부르주아들은 처음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기존 체제에 맞서 싸웠어요.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태도를 바꿨어요. 노동자들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거죠.

"독일 부르주아지는 너무 늦게 등장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분석했어요.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아직 노동자 계급이 강하지 않을 때 혁명을 했지만, 독일 부르주아들은 이미 노동자 계급이 조직화된 후에 혁명을 시도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독일 부르주아들은 처음부터 노동자들을 경계했어요. 혁명을 통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 거죠. 결국 그들은 기존 권력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어요.


혁명과 반혁명의 역학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을 통해 '혁명과 반혁명의 역학'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어요. 혁명은 단순히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1848년 혁명도 그런 과정을 보여줬어요. 2월에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어요. 하지만 6월 봉기가 진압된 후 반혁명의 물결이 시작되었어요. 각국의 보수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잡기 시작한 거죠.

마르크스는 이런 현상을 '영구혁명'의 관점에서 이해했어요. 부르주아 혁명이 중도에서 멈추면,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었죠.


언론의 역할

『새 라인 신문』을 발행하면서 마르크스는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했어요. 혁명에서 이론적 지도만큼 중요한 것이 여론 형성이었거든요. 마르크스는 신문을 통해 대중들에게 혁명의 의미를 설명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언론의 한계도 느꼈어요. 아무리 좋은 기사를 써도 현실의 힘의 관계를 바꿀 수는 없었거든요. 결국 중요한 것은 조직된 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이후 언론 활동보다는 노동자 조직화에 더 집중하게 되었어요.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

1848년 혁명을 통해 마르크스는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도 깨달았어요. 각국의 혁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거든요. 파리 혁명이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로 번져나간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반혁명도 국제적으로 연대했어요. 러시아 차르가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는 데 군대를 보낸 것이 대표적인 예였죠. 마르크스는 이를 보고 "혁명가들도 국제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이는 나중에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창설로 이어져요. 『공산당 선언』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현실적 필요라는 것을 1848년 혁명이 증명한 거였어요.


핵심 개념 정리

계급투쟁론의 실증: 1848년 혁명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이론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준 살아있는 교과서였어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처음에는 연합했다가 나중에는 대립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거든요.

부르주아의 이중성: 부르주아는 봉건제에 맞서서는 혁명적이지만, 노동자 계급에 맞서서는 보수적이라는 것을 확인했어요.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이 위협받으면 언제든지 기존 권력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영구혁명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중도에서 멈추면,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론이에요. 1848년 독일 혁명의 실패를 분석하면서 나온 개념이죠.

혁명의 국제성: 혁명과 반혁명 모두 국경을 넘나든다는 인식이에요. 한 나라의 혁명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반혁명 세력들도 국제적으로 연대한다는 거였어요.

언론과 선전의 중요성: 혁명에서 이론적 지도와 여론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언론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조직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어요.

민족 문제: 독일 혁명을 통해 민족 통일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민족 통일이 민주주의 발전에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1848년 혁명은 마르크스에게 이론과 실천을 결합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어요. 책상 위에서만 연구하던 계급투쟁이 현실에서 어떻게 벌어지는지 직접 목격할 수 있었거든요. 이 경험은 나중에 『자본론』을 쓸 때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특히 부르주아의 이중적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 중요했어요. 마르크스는 이후 부르주아를 무조건 적대시하지도, 무조건 신뢰하지도 않았어요. 상황에 따라 연합할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계급이라고 냉정하게 판단했죠.

1848년 혁명의 실패는 마르크스에게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소중한 교훈이기도 했어요. 혁명은 단순히 열정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치밀한 준비와 올바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거든요.

또한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조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어요. 부르주아에게 의존해서는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거죠. 이는 나중에 국제노동자협회를 만드는 이론적 바탕이 되었어요.

마르크스의 1848년 혁명 관련 글들은 단순한 시사 평론이 아니에요. 혁명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생생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깊이 있는 이론적 분석이기도 해요. 역사가이자 혁명가였던 마르크스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저작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읽어봐도 여전히 흥미진진해요. 마치 혁명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있거든요. 30살의 마르크스가 『새 라인 신문』 편집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쓴 이 기사들이 1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혁명이란 무엇인가?", "왜 혁명은 실패하는가?",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답변은 지금도 유효해요.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글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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