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습격한 사람들
저술의 배경과 마르크스의 삶
1871년 3월 18일 새벽, 파리에서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어요. 파리 시민들이 정부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한 거예요.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 코뮌이 탄생한 순간이었죠.
런던에 있던 53살의 마르크스는 이 소식을 듣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어요. 20여 년간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드디어 현실이 된 것 같았거든요. 마르크스는 즉시 파리의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파리 코뮌을 낙관한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걱정이 더 많았어요. 파리만 고립된 상태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프랑스 전체, 나아가 유럽 전체의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실제로 마르크스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프랑스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어요.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의 도발에 넘어가서 무모한 전쟁을 시작했다고 비판했거든요. 국제노동자협회를 통해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이 전쟁은 노동자들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전쟁은 예상대로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어요.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고, 파리는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었어요. 파리 시민들은 4개월 동안 포위 상태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어요. 심지어 동물원의 동물들까지 잡아먹을 정도였죠.
1871년 1월, 프랑스 정부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어요.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넘겨주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한 거예요. 파리 시민들은 이런 굴욕적 평화에 분노했어요. 자신들이 그토록 고생하며 저항했는데, 정부는 너무 쉽게 항복해버린 거였거든요.
더욱 화가 난 것은 새로 구성된 국민의회였어요. 시골 지역에서 선출된 보수적인 의원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이들은 파리를 불신했고, 수도를 베르사유로 옮겨버렸어요.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배신당했다고 느꼈어요.
결정적인 사건은 3월 18일에 일어났어요. 정부가 파리의 대포를 회수하려고 군대를 보낸 거예요. 이 대포들은 파리 시민들이 프로이센군과 싸우기 위해 자비로 구입한 것이었어요. 시민들은 "우리가 산 대포를 왜 가져가느냐"며 저항했어요.
정부군 병사들도 시민들의 편에 섰어요. 장군 두 명이 시민들에 의해 처형되었고, 정부군은 베르사유로 도망쳤어요. 파리는 완전히 시민들의 손에 넘어갔어요. 마르크스가 나중에 "하늘을 습격한" 사건이라고 부른 파리 코뮌이 시작된 거였어요.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복잡한 심정이었어요.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해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어요. 파리만 고립된 상태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저술의 핵심 내용 정리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에 대해 세 편의 중요한 글을 썼어요. 국제노동자협회의 성명서 형식으로 발표된 이 글들은 나중에 『프랑스 내전』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서 출간되었어요. 마르크스의 정치 분석 능력이 절정에 달한 작품들이에요.
제1차 성명서 - 전쟁에 대한 경고
첫 번째 성명서는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발표된 거예요. 마르크스는 이 전쟁이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경고했어요.
"이 전쟁에서 프랑스 노동자들은 나폴레옹 3세의 야망을 위해 싸우는 것이고, 독일 노동자들은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양쪽 모두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라는 거였어요.
마르크스는 특히 독일 노동자들에게 호소했어요. 이 전쟁이 방어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침략 전쟁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예언했어요. 실제로 프로이센이 승리한 후 알자스-로렌을 병합한 것을 보면 마르크스의 예측이 정확했어요.
제2차 성명서 - 공화국의 한계
두 번째 성명서는 1870년 9월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고 공화국이 선포된 후 발표되었어요. 마르크스는 새로운 공화국 정부에 대해 냉정한 분석을 했어요.
"이 공화국은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인물만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 정부라는 거였어요. 특히 국방정부의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어요. 이들은 독일과의 전쟁보다 파리 노동자들을 더 두려워한다고 지적했어요.
마르크스는 파리가 포위된 상황에서도 정부가 제대로 저항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어요. 오히려 독일과의 굴욕적 평화를 추진하면서 파리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한다는 거였어요.
제3차 성명서 - 파리 코뮌 찬양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성명서는 1871년 5월 파리 코뮌이 진압된 직후 발표되었어요. 이 글에서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열렬히 옹호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분석했어요.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규정했어요. 지금까지는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을 갖는지 보여준 최초의 사례라는 거였어요.
코뮌의 혁신적 조치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실시한 여러 조치들을 자세히 분석했어요. 이 조치들은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국가 형태를 보여줬거든요.
첫째,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장한 시민으로 대체했어요. 모든 시민이 국민방위군에 참여해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체제였죠. 이는 국가의 폭력 독점을 깨뜨린 혁명적 조치였어요.
둘째, 경찰을 코뮌의 책임 있는 공무원으로 바꿨어요. 기존의 경찰은 시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기구였지만, 코뮌의 경찰은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기구였어요.
셋째, 모든 공무원을 선거로 선출하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게 했어요. 또한 공무원의 급여를 일반 노동자 수준으로 제한했어요. 이는 관료주의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죠.
넷째,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했어요.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종교 교육을 폐지했어요. 대신 무료 세속 교육을 실시했어요.
다섯째, 야간 노동을 금지하고, 벌금제를 폐지했어요. 또한 노동자들이 버린 작업장을 협동조합으로 운영할 수 있게 했어요.
코뮌의 국제적 성격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단순히 프랑스만의 사건이 아니라 국제적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어요. 코뮌에는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독일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등 각국 출신들이 참여했거든요.
특히 코뮌이 독일인 포로들을 석방하고, 반독일 감정을 억제한 것을 높이 평가했어요.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주의 정신을 보여준 것이라고 봤어요.
마르크스는 또한 코뮌이 베르사유 정부와 프로이센 사이의 협력을 폭로했다고 지적했어요.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외국 침략자와 손을 잡고 자국 노동자들을 탄압한 것은 부르주아의 반민족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거였어요.
코뮌의 한계와 교훈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찬양하면서도 그 한계를 냉정하게 분석했어요.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 은행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었어요. 코뮌은 베르사유 정부의 금고는 존중했으면서, 정작 자신들의 재정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거든요.
또한 베르사유로 진격하지 않은 것도 큰 실수였다고 봤어요. 코뮌이 성립된 초기에는 베르사유 정부가 매우 약했는데, 그때 공격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한계들이 코뮌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고 봤어요. 오히려 미래의 혁명가들이 배워야 할 소중한 교훈이라고 평가했어요.
"하늘을 습격한" 영웅들
마르크스는 코뮌 참가자들을 "하늘을 습격한" 영웅들이라고 불렀어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신들의 영역에 도전한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어요.
비록 코뮌은 72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이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했어요. "파리는 불타고 있지만, 코뮌의 정신은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핵심 개념 정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 형태: 파리 코뮌은 마르크스가 이론적으로 제시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을 갖는지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어요. 상비군 폐지, 공무원 선출제, 급여 제한 등은 기존 부르주아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국가 형태를 제시했어요.
국가 기구의 파괴와 재건: 마르크스는 코뮌이 기존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한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새롭게 재건했다고 봤어요. 이는 나중에 레닌의 국가론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혁명은 기존 국가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교훈이었죠.
직접 민주주의: 코뮌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했어요. 모든 공무원을 직접 선출하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게 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선출된 대표들이 특권층이 되는 것을 방지한 거였죠.
국제주의의 실천: 코뮌에는 각국 출신들이 참여했고,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적 연대를 보여줬어요. 특히 독일인 포로들을 석방하고 반독일 감정을 억제한 것은 진정한 국제주의 정신의 발현이었어요.
부르주아의 반민족적 성격: 베르사유 정부가 프로이센과 협력해서 파리 코뮌을 진압한 것은 부르주아의 계급적 성격을 보여줬어요. 그들에게는 민족보다 계급 이익이 더 중요했던 거죠. 이는 나중에 제국주의 시대에 더욱 명확해져요.
혁명의 방어적 성격: 파리 코뮌은 공격적 혁명이 아니라 방어적 혁명이었어요. 시민들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탄압에 맞서 자신들을 방어한 거였죠. 하지만 이런 방어적 태도가 오히려 한계가 되기도 했어요.
사회주의 정책의 맹아: 코뮌이 실시한 여러 조치들(야간 노동 금지, 협동조합 지원 등)은 사회주의 정책의 초기 형태를 보여줬어요.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 중심의 정책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했어요.
파리 코뮌은 비록 72일 만에 끝났지만,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요. 러시아 혁명의 레닌, 중국 혁명의 마오쩌둥, 쿠바 혁명의 카스트로 등 20세기의 모든 혁명가들이 파리 코뮌에서 교훈을 얻었거든요.
특히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파리 코뮌을 집중적으로 분석했어요. 마르크스의 코뮌 분석을 바탕으로 소비에트 체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거죠. 물론 실제 소련이 코뮌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요.
마르크스 자신도 파리 코뮌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이전까지는 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는데, 코뮌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특히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이 더욱 명확해졌어요. 이전에는 국가를 단순히 지배계급의 도구로만 봤는데, 코뮌을 통해 국가 기구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파리 코뮌의 "하늘을 습격한"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영감을 줘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용기 있게 도전하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거든요. 비록 실패했지만, 그들의 도전 정신은 후세에 큰 유산을 남겼어요.
53살의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바라본 파리 코뮌은 그에게 이론과 현실이 만나는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책상 위의 이론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는지 직접 목격할 수 있었거든요.
마르크스의 파리 코뮌 분석은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에요. 혁명의 본질, 국가의 성격,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긴 정치학의 고전이에요. 지금 읽어봐도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텍스트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