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향연>
안녕하세요, 여러분. 사랑이라는 깊고도 아름다운 여정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아주 기이하고도 황홀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독 한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듯한 경험 말입니다. 시끄러운 공간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리고,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그의 얼굴만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듯한 그 순간. 우리는 이것을 ‘첫눈에 반했다’는 진부하지만 강력한 한마디로 표현하죠.
이 불가사의한 ‘끌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현대 과학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뇌과학자들은 사랑에 빠진 뇌가 특정 신경전달물질, 예컨대 도파민과 옥시토신을 분비하며 극도의 쾌감과 애착을 형성한다고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나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에 가장 적합한 상대를 무의식적으로 알아보는 생존 본능의 발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모두 타당한 설명이며,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생물학적 작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은 우리가 ‘어떻게(How)’ 끌리는지에 대한 답이 될지는 몰라도, 우리가 ‘왜(Why)’ 끌리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의미까지 알려주지는 못합니다. 나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 강렬한 욕망은 단순히 호르몬의 장난이나 종족 번식의 명령을 넘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 같은 어떤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고대 그리스 아테네로 시간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젊은 작가 아가톤의 집에서 열린 떠들썩한 축하연, 그곳에 모인 아테네 최고의 지성들이 ‘사랑의 신 에로스(Eros)’를 찬양하며 밤새도록 나누었던 대화의 기록. 그것이 바로 플라톤의 저서 『향연(Symposium)』입니다. 이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봅시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당대 최고의 희극 작가였던 아리스토파네스가 사랑의 기원에 대한 아주 매혹적이면서도 슬픈 신화를 들려줍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태초에 인간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인간에게는 세 가지 성(性)이 있었는데, 남성과 여성이 결합한 ‘남녀추니’, 남성과 남성이 결합한 것, 그리고 여성과 여성이 결합한 것이었죠. 이들은 등과 옆구리가 하나로 붙어 공처럼 둥근 모양에, 팔다리가 네 개씩 달린 강력하고 오만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힘과 오만함이 신들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제우스는 고민 끝에 그들을 번개로 내리쳐 둘로 쪼개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꿰매 배꼽을 만들고, 얼굴을 잘린 방향으로 돌려놓아 자신들이 어떤 벌을 받았는지 항상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바로 이 ‘분리’의 비극에서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둘로 나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 했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어 인간 본성의 옛 모습을 되찾으려는 소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 이처럼 우리가 온전한 하나가 되려는 욕망과 추구를 ‘사랑(에로스)’이라 부릅니다.”
- 플라톤, 『향연』, 191c-191d
반으로 나뉜 인간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평생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군가를 그토록 애타게 갈망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는 듯한 충만함을 느끼는 이유라는 설명입니다. ‘소울메이트’,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말은 바로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에 ‘운명’이라는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며,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낭만적인 대답을 들려줍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마냥 취해있기 전에 잠시 멈추어 질문을 던져봅시다. 만약 사랑이 단지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반쪽 찾기’에 불과하다면, 상대방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고유한 인격체가 아니라 ‘나의 완전성을 위한 도구’나 ‘부속품’으로 전락할 위험은 없을까요? “너는 내 반쪽이야”라는 달콤한 말이, 사실은 “너는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해”라는 이기적인 소유욕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연회의 주인공 소크라테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낭만적인 이야기에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때, 마침내 소크라테스가 입을 엽니다. 그는 자신은 사랑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만티네이아 출신의 지혜로운 여인 디오티마에게서 배운 것을 전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며 사랑에 대한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첫째,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풍요의 신 포로스와 결핍의 신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다이몬(Daimon)’, 즉 신과 인간의 중간자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신도 아니고, 모든 것이 없는 비참한 존재도 아닌, 언제나 무언가를 갈망하며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사랑의 본질이 ‘소유’가 아닌 ‘결핍’과 ‘갈망’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 더 나은 것, 영원한 것을 갈망하기에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디오티마는 이 갈망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아름다움의 사다리(Ladder of Ascent)’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하나의 대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 보편적이고 높은 차원의 아름다움을 향해 상승하는 영혼의 역동적인 등반 과정이라는 것이죠.
“올바른 길을 가려는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아름다운 육체들을 찾아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그는 먼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아름다운 육체들 속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그 후 그는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 플라톤, 『향연』, 210a-210c
디오티마가 제시하는 ‘사랑의 사다리’의 다섯 계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한 사람의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사랑: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시작점입니다. 특정인의 외모에 강렬하게 끌리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2단계] 모든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사랑: 한 사람의 육체를 통해 ‘아름다움’ 그 자체의 속성을 깨닫고, 다른 모든 육체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특정인에 대한 맹목적 집착에서 벗어나는 단계입니다.
[3단계] 아름다운 영혼(정신)에 대한 사랑: 겉으로 보이는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 용기, 절제와 같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훨씬 더 가치 있음을 깨닫는, 관계가 깊어지는 결정적인 단계입니다.
[4단계] 학문과 제도, 지식에 대한 사랑: 아름다운 영혼들을 길러내는 사회의 훌륭한 활동이나 제도, 그리고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과 지식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사랑의 지평이 개인을 넘어 사회와 세계로 넓어지는 단계입니다.
[5단계] ‘아름다움 자체(美의 이데아)’에 대한 사랑: 마침내 모든 개별적인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 그 자체’, 즉 진리를 관조하고 사랑하는 철학적 사랑의 완성 단계에 이릅니다.
소크라테스의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최초의 강렬한 육체적 끌림은 결코 저급하거나 얕은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위대한 등반을 시작하게 하는 가장 소중하고 강력한 첫걸음이라고 말입니다. 다만, 진정한 사랑의 여정은 그 첫 계단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 끌림을 동력 삼아 용기 내어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향연』을 통해 사랑의 시작인 ‘끌림’에 대한 두 가지 위대한 관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을 ‘나의 반쪽을 찾아 완전해지려는 그리움’으로, 소크라테스는 ‘나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며 더 높은 단계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상승의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왜 저 사람에게 끌리는가?”
“나의 이 끌림과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단순한 결핍의 채움을 넘어, 이 사랑을 통해 나는 어떻게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