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왜 사소한 말다툼은 우주가 되는가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by 김경윤

1. 사랑하는 나는 ‘언어를 앓는’ 사람이다

지난 시간 우리는 에리히 프롬과 함께, 사랑이 운명에 내맡기는 감정이 아니라 부단히 연마해야 할 ‘기술’임을 배웠습니다. 보호하고, 책임지고, 존경하고, 알아가는 그 능동적인 실천의 중요성을 확인했죠. 하지만 우리의 결심이 아무리 굳건해도, 사랑의 여정에는 어김없이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바로 ‘갈등’이라는 이름의 폭풍우입니다.

“양말은 왜 뒤집어 벗어놔?”, “내 카톡 메시지 왜 바로 확인 안 했어?”,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

사랑의 역사는 종종 이렇게 사소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로 인해 파국을 맞곤 합니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저런 걸로 왜 싸워?” 싶을 만큼 하찮은 일인데, 그 순간 당사자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과 분노를 안겨주죠. 왜 연인 사이의 사소한 갈등은 이토록 격렬한 감정의 폭풍을 동반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같은 문제로 지겹도록 싸우면서도, 그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섬세하고도 독창적인 답변을 들려주기 위해, 오늘 우리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사랑을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합니다. 대신, 그의 독특한 저서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에서, 사랑에 빠진 주체, 즉 ‘사랑하는 사람’이 내뱉는 고독한 독백과 그가 느끼는 감정의 조각(Fragment)들을 알파벳 순서로 나열하고 그 의미를 탐색합니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사용 설명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고뇌하는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 편의 연극 대본과 같습니다.

바르트에게 사랑에 빠진 주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연인의 사소한 눈짓, 말투의 미묘한 변화, 메시지에 찍힌 마침표 하나까지도 나에게는 거대한 의미를 가진 ‘기호(Sign)’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담론은 오늘날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는 극단적인 고독의 담론이다. (…) 이 담론은 어떤 권력 기관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지식의 여러 갈래에서도, 과학에서도, 예술에서도 완전히 버림받았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서문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연인이 보내는 수많은 기호들을 홀로 해독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고독한 ‘해석가’가 됩니다. 마치 암호 해독가처럼, 나는 상대의 모든 행동 뒤에 숨겨진 의미, 즉 “나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궁극적인 메시지를 읽어내려 애씁니다. 그리고 모든 갈등은 바로 이 절박한 ‘해석’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어긋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2. 갈등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몇 개의 ‘단상(Fragment)’

바르트가 제시하는 몇 개의 ‘단상’을 통해 갈등이 어떤 양상으로 펼쳐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기다림(Attente)’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기다리는 자입니다. 그의 전화, 그의 메시지, 약속 장소에 나타날 그의 모습을 기다립니다. 바르트는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온갖 환상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왜 연락이 없지? 나한테 관심이 식었나?”, “사고라도 났나?” 긍정적인 상상과 부정적인 상상이 교차하며, 나는 혼자만의 드라마를 쓰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약속 시간에 5분 늦는 그를 기다리며, 나는 5분 동안 ‘그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분노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가 나타나 해맑게 웃을 때, 나는 이미 혼자만의 드라마에 지쳐 그에게 짜증을 내고 맙니다. 수많은 갈등이 바로 이 고독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잉태되는 것입니다.


둘째, ‘언쟁(Scène)’입니다. 바르트는 연인들의 다툼을 한 편의 격렬한 ‘연극’으로 묘사합니다. 이 연극의 진짜 목적은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지 않는지 봐!”라고 외치며,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전시하고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몸짓에 가깝습니다.


“언쟁이란 하찮은 것에서부터 생겨난다. (…) 언쟁의 기능은 언어의 완전한 유출이다. 그것은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과 같다. 상처받은 사람은 말을 하고, 또 말을 한다. 그는 자신의 불행과 상대방의 잘못을 수천 가지 세목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언쟁’ 중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내고(“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 “그럴 거면 헤어져!”),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격렬하게 화해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패턴. 이 ‘언쟁’이라는 드라마는 사랑이 살아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이자,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곪아 터지는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셋째, ‘알 수 없는(Inconnaissable)’ 존재로서의 타인입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려 해도, 그는 결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가진 타인입니다. 그에게는 내가 모르는 과거가 있고, 나에게 다 말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알 수 없음’ 앞에서 좌절하고 불안을 느끼며, 그 미지의 영역을 캐내려다 갈등을 유발합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해?”라는 질문은 바로 이 불안의 표현이며, 상대의 세계를 온전히 소유하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상대의 핸드폰을 몰래 보거나, 과거 연애사를 집요하게 캐묻는 행동은 모두 이 ‘알 수 없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3. 갈등을 ‘긍정’한다는 것의 의미

그렇다면 바르트는 이 고통스러운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처방을 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아픔을 함께 앓는 친구에 가깝습니다. 그에게 이 모든 혼란과 고통, 오해와 드라마는 사랑의 병리적인 증상이 아니라, ‘사랑함’이라는 행위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리고, 오해하고, 다투고,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어 안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갈등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를 ‘긍정’하고 그 안에서 상대방과 나의 모습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것입니다. “나는 왜 그의 ‘읽씹(읽고 답장 안 함)’이라는 기호에 이토록 큰 배신감을 느끼는가?”, “그는 왜 나의 ‘서운하다’는 말을 ‘비난’으로 해석하는가?”, “우리의 갈등이 어떤 반복적인 패턴을 그리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 이것이 바르트가 제안하는 사랑의 지혜입니다.


갈등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와 나는 이렇게 다른 우주를 가진 존재야”라고. 어쩌면 갈등의 진짜 원인은 ‘너와 나의 차이’가 아니라, ‘너와 내가 똑같아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숨겨진 폭력성 때문은 아닐까요? 상대방을 나의 해석 틀 안에 가두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사랑을 표현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성숙은 상대방의 ‘알 수 없음’을, 그의 불투명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껴안는 데서 시작될지 모릅니다. “나는 너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르트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갈등은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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