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열쇠 : 어슬렁거리며 놀아라

소요유(逍遙遊)

by 김경윤

자, 그러면 그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장자』 내편(內篇)의 첫 편 제목이 ‘소요유(逍遙遊)’입니다. 풀어보면, ‘어슬렁거리며 놀아라’예요. 묵직한 철학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번째 관문에 놓인 명패가 참 재밌지요. 놀이터에 온 기분으로 천천히 어슬렁거리면서 본문을 감상해봅시다.

1-1

북해에 한 물고기 있는데 이름은 곤(鯤)이라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이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天池)’다.

재해는 뜻이 괴이한 사람이다.

재해의 말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

안개와 먼지는

생물이 생기(生氣)를 서로 불어주는 것이다.

천지가 푸른 것은 바로 생기의 색이며,

그것은 원대하고 끝이 없는 지극한 것이다.

대붕이 내려다보는 것은

역시 아마 안개, 먼지 등 생기였던 것이다.

또한 물이 쌓여 두껍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마당 웅덩이에 술잔의 물을 부으면

겨자씨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

술잔을 띄우면 붙어버릴 것이니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기가 쌓여 두껍지 않으면

대붕도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리의 바람이 발아래에 있어야만

바람을 탈 수 있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막힘이 없어야만

장차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흉측한 벌레로 변하게 돼요. 이렇게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그동안의 정상적으로 맺었던 가족관계와 사회관계를 모두 박탈당한 채 홀로 외롭게 죽어갈 운명에 처하고 말지요. 비극적 변신이 아닐 수 없네요. 게다가 그러한 변신이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아닐 수 없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비극적인 변신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리스로마신화를 보면 변신은 신의 능력 중 가장 탁월한 능력에 하나이지요. 올림포스의 최고신 제우스는 사랑하는 여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변신해요. 나중에 정식 아내가 된 헤라에게 다가가기 위해 비둘기로 변하는가 하면 공주 에우로파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멋진 흰 소로 변하기도 하지요, 심지어는 비로도 변해서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취하기도 해요.

한편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는 자신의 모습을 투명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도구로 등장해요. 고대판 투명인간의 탄생이지요. 어찌 투명인간뿐이겠습니까. 거미에게 물려 영웅으로 변한 스파이더맨, 멍청한 기자였다가 몇 바퀴만 돌면 모양이 돌변하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 역시 변신의 귀재가 아닐 수 없어요. 최근 들어 아예 『트랜스포머(transformer)』라는 제목을 달고 상영된 영화는 평소에는 자동차였다가 인류가 위험한 순간에 변신로봇으로 변하여 인간세상을 구하는 변신(transformation)의 변모를 보여주잖아요.


하지만 변신의 최고치는 장자의 『장자(莊子)』에 나와요. 장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위대한 변신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요?


“ 북해에 한 물고기 있는데 이름은 곤(鯤)이라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이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天池)’다.”


장자의 권위자 버튼 와트슨(Burton Watson)은 이 대목에 이렇게 주를 달아놓았습니다. “곤은 물고기 알이다. 그러니까 장자는 역설로 시작된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물고기가 또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물고기가 될 수 있다는 역설.” 거기에 나는 이렇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아니다. 그건 약과다. 물고기 알이 물고기가 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물고기가 새가 된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을 것이다.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니까!”

이 작은 곤이 붕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혹시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존재[鯤]처럼 살아가는 민중에게 큰 꿈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남들이 보기에 우리가 비록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여러분은 아주 크나큰 존재이다. 곤이 붕이 되듯이!” 장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사실 쓸모없는 존재가 더욱 쓸모 있는 존재로 탈바꿈하지요. 존재의 역전 드라마가 곧 장자에 이야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사고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야 해요.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지 않는 자존감의 회복은 자유로운 사고로부터 시작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왜 1장의 제목이 ‘소요유’인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지요.

한 가지 더. 이 거대한 새 붕(鵬)도 자기 힘만으로는 날지 못해요.


“마찬가지로 대기가 쌓여 두껍지 않으면

대붕도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리의 바람이 발아래에 있어야만

바람을 탈 수 있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막힘이 없어야만

장차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어떤 위대한 것도 혼자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붕이 날기 위해서는 구만리의 바람이 있어야 해요. 이 세상에 혼자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요. 못난 것은 못난 것끼리라도 손 붙잡고 힘을 합쳐 살아야 해요. 큰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더욱더 힘을 합쳐야지요. 인간(人間)이란 말 자체가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어요. 사람[人]은 사람 사이[間]에서 살아가는 거지요.


장자는 인간의 가치는 지배자의 시선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지배자의 가치에 맞추어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충성이니, 인의(仁義)니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맞추지 못하면 열등한 존재로 평가를 받게 되고요, 그렇게 평가절하된 당대의 민중에게 장자는 그들은 소중한 존재이며, 위대한 존재임을 알리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1-2

매미와 텃새가 대붕을 비웃이며 말했다.

“내가 결심하고 한번 날면

느릅나무와 빗살나무까지 갈 수 있다.

어쩌다가 가끔 이르지 못하여

땅에 곤두박질할 때가 있지만

무엇 때문에 구만리 창공을 날아

남쪽으로 간단 말인가?

들판에 나가는 자는

두 끼니면 돌아올 때까지 배가 부를 것이다.

그러나 백 리를 가는 자는 하루 묵고 올 양식을 찧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이들 두 벌레가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를 미치지 못하고

어린 아이는 어른의 지혜를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아침에 돋아나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사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먼 옛날에는 큰 참죽나무가 있었다는데

이것은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팔백 년을 산 팽조는 지금껏 최상수라고 소문나서

사람마다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니 슬픈 일이 아닌가?

이런 것이야말로 작은 것과 큰 것의 분별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큰 꿈을 잊은 채, 우리가 존귀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모든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 큰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은 채,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매미와 텃새처럼, 위대한 삶을 선택하려는 자를 비웃고, 그저 자신에게 놓인 환경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진 않나요? 하루하루의 작은 지혜면 된다면서, 하루 세 끼 식사만 먹으면 족하다면서, 때로 ‘땅에 곤두박질치더라도’ 그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서양철학자 니체는 『아침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눈이 지금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밖에 보지 못한다. 내가 활동하고 사는 공간은 이렇듯 작은 곳이다. 이 지평선이 크고 작은 직접적인 내 운명을 규정하고, 나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 자신에게 특유한 하나의 원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 원에는 중심이 있다. 마찬가지로 귀도 우리를 하나의 작은 공간에 가두며, 촉각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감옥의 벽 속에 가두듯이 가두는데, 우리는 이런 지평에 따라 세계를 측정하면서, 이것은 가깝고 저것은 멀며,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고, 이것은 딱딱하고 저것은 부드럽다고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측정을 감각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은 오류 그 자체다!”


「감옥에서」라는 제목의 글의 일부예요. 우리는 우리의 공간 안에서만 살아가지요. 그래서 그 세계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지요. 니체는 이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감각을 ‘오류 그 자체’라고 하네요. 장자도 말했어요. “아침에 돋아나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사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각,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우리가 좋다고 판단한 가치들만을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장자는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이 처한 곳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사이즈로 성장해야 하며, 좀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해야 한다고 말해요. 세상을 초월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초월적 높이가 필요하다는 거지요.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과의 거리를 확보해야 돼요. 즉 자신을 바라볼 초월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조금은 삶을 느긋하고 여유롭게 노는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으로는 자유를 얻을 수 없어요.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날 없어요. 자유는 놀이정신, 유희정신의 산물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쓸 데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느긋하게 놀아보세요. 그러다 보면 자유로 가는 첫 번째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장자 Tip
1. 때로 삶이 힘들거든 무작정 놀아봐라. 걱정일랑 벗어버리고 아무런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걸어봐라.
2. 그때의 휴식은 삶의 재충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재포맷을 위한 것이다.
3.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하고 존엄하며 커다란 존재임을 기억하라. 하지만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4. 그대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싶거든 그대를 떠나라. 그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까지 비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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