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열쇠 : 넘치지 마라

양생주(養生主)

by 김경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치 신인 것처럼 우쭐댈 필요는 없어요. 우리의 이번 생애는 어차피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니까요. 김삿갓이 말했나요? “백 년도 못 사는 인생이 천 년을 걱정하고 있다”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삶의 유한성을 망각한 채, 마치 자기가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살아가요. 그렇다고 느긋하게 살아가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정신없이 전력질주하며 살지요.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며 유일하게 존재하는 현재를 소모하듯이 살아가지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요. 간디는 말했지요. “인류의 자산은 온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넘쳐나지만, 단 한 사람의 욕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요. 특히 경쟁과 승리를 삶의 태도로 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1등주의나 성공신화에 대한 열망은 너무도 흔하지요. 그때는 아래를 읽어보세요.


3-1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지혜는 무한하다.

유한한 인생으로 무한한 지혜를 따르면 위태로울 뿐이다.

아서라! 지혜대로 행하는 것은 더욱 위태롭다.

좋은 일을 행해도 명예를 붙이지 말고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며

중정(中正)을 따라 무위자연의 상도(常道)를 행한다면

몸을 보존할 수 있고 생을 온전히 할 수 있으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고 수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인간의 과학으로 해명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믿는 과학주의자들, 흠집 하나 없이 일이 처리되기를 원하는 완벽주의자들, 혹은 완전범죄주의자들, 좌로나 우로나 극단적인 사상에 사로잡혀 실제 사람의 삶을 외면하고 이론적으로 재단하려는 푸로크루테스와 같은 자들에게 장자는 말해요. 과신하지 말라고, 과욕을 부리지 말라고, 지나치지 말라고, 요즘 말로 오버하지 말라고요.


대신 중정(中正)을 지키라고, 무위자연의 상도(常道)를 따르라고 충고하지요.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표현되는 이러한 삶의 태도는 지혜자들의 한결같은 입장을 보여주고 있지요. 고타마 싯달타는 젊었을 적 최상의 쾌락을 누려보았고, 출가해서는 죽음에 이를 만큼 고행도 해 보았지만, 그 어느 길도 깨달음에 도달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절감했지요. 그때 한 늙은 연주자가 지나가면서 이야기했어요.


“줄을 너무 세게 조이면 줄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풀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네.”


이 말을 듣고, 싯달타는 깨달았지요.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극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 중간의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바른 삶과 명상을 지속적으로 해나간다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비단 불교만의 것은 아니에요.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여기는 『중용(中庸)』은 제목 자체가 중도의 길을 가르치고 있지요.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삶과 생각[中]을 지속적으로 실천[庸]하는 것의 중요함을 늘 강조했지요.


『중용』에서 공자는 말해요.


“순임금은 매우 지혜롭도다! 순임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아주 일상적인 말도 그냥 넘기지 않고 잘 생각해 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나쁜 점은 묻어 주고 좋은 점은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양극단을 파악하여 그 가운데를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점이 순임금다운 점이다.(舜 其大知也與 舜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중국의 태평천하를 열었던 요순시대에 순임금의 지혜는 바로 극단적인 것을 선택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지혜를 얻어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사용했다는 점이지요.

노자나 장자가 이야기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을 뜻하지요. ‘자연(自然)’이란 말도, 오늘날의 자연(nature)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는 문장이에요. 그러니까, 무위자연이란 억지로 하지 말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실천하라는 말인 셈이지요.


3-2

백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이 닿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밟고

무릎이 닿는 대로 삭삭 울리고

칼이 나가는 대로 쉭쉭 소리를 내는데

음악에 맞지 않음이 없어

‘상림(桑林)’의 춤과

‘경수(經首)’의 잔치에 알맞은 것 같았다.

문혜군은 감탄했다. “하!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쩌면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백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얻은 결과는 도(道)이며

기술보다는 우월한 경지입니다.

처음 소를 해체할 때는

보이는 것이 모두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이제 소 전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금 저는 소를 정신으로 대했을 뿐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감관의 지각이 멈추면 정신이 움직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의지하여 큰 틈새로 들이밀고

큰 구멍을 통행하여 본래의 자연을 따릅니다.

기술자는 힘줄을 다치지 않고

더구나 뼈는 닿지 않습니다.

우수한 백정도 해마다 칼로 바꾸는데

힘줄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다치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소를 수천 마리 잡았으나

칼날은 숫돌에서 새로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마디는 틈이 있으나

제 칼날은 두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로 넣으니 텅 빈 듯 넓어서

칼질이 춤을 추듯

반드시 여유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십구 년이 지났으되

칼이 방금 숫돌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백정들이

어렵게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안타깝게 여겨 타이르기도 하는데,

보는 것을 그치고

행동을 서서히 하게 하면

움직이는 칼이 심히 미묘해져

재빠르게 소를 해체해 버립니다.”

그는 흙이 땅에 맡기듯 칼을 들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머뭇거리다가

만족한 마음으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을 터득했도다.”


위의 이야기에는 문혜군과 백정이 나오네요. 백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를 잡는데 그 솜씨가 귀신같았나 봐요. 문혜군이 절로 감탄하지요. 그리고 물어요.


“기술이 어쩌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문혜군의 관점을 정확히 보여주는 질문이지요. 문혜군은 백정이 소를 잡는 모습 속에서 ‘기술’을 알고 싶었던 거예요. 세상을 기능주의적으로 파악하려는 지배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오늘날을 기술만능주의, 혹은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심지어는 침대마저 ‘과학’의 이름을 팔아야 잘 팔리는 시대지요. 이 ‘과학숭배’는 인간의 삶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부작용을 낳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연의 파괴와 도구주의적 관점의 팽배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자연의 파괴는 굳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이니, 도구주의에 대해서만 간략히 이야기해볼게요. 비판철학으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하버마스는 인간의 이성을 도구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으로 나누어 고찰했지요. 도구적 이성은 이성을 실용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거예요. 주로 ‘노하우(know-how)’와 관계하는 이 이성은 “어떻게 하면 ~~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대학입시에 합격할 수 있을까?” 등등 수없이 많은 질문이 이에 해당해요.


그런데 이 이성은 윤리와 정당성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지요. 쉽게 말해 사기를 쳐도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뇌물을 써도 문제만 빨리 해결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요. 문제가 되는 것은 효율성만을 고려하면 되지요. 이러한 이성이 극단적으로 작동하면, 2차 대전 때에 아우슈비츠 감옥의 학살도, 회사경영의 정상화를 명분으로 하는 대량 해고조치도,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이전의 거주민을 불법적으로 몰아내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지요.

인간의 생명조차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도구적 이성, 즉 도구주의의 위험성이에요.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피실험자(여성)의 난자를 비윤리적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황우석 사태가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네요.


그래서 그랬는지, 문혜군의 대답에 백정은 차원을 달리한 대답을 하지요.


“제가 얻은 결과는 도(道)이며 기술보다는 우월한 경지입니다.”


기술이 아니라 도(道)라고 말이에요. 기술과 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기술을 부리면 소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술을 부리는 자의 칼날도 무뎌지게 되는 결과를 낳아요. 남을 해치면서 자신도 덩달아 해침을 당하게 되지요. 그러나 도(道)는 달라요. 도는 자연의 이치에 의지하여 자연을 따르지요. 그래서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아도 그 칼날이 조금 더 무뎌지지 않게 돼요. 이 정도쯤 되면 기술(art)이 아니라 예술(art)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요.


도(道)를 따르는 자는 무리하지 않아요. 넘치지도 않지요. 물결이 치면 물결을 따라, 소를 잡을 때에는 소의 살결을 따라, 조심조심 한 발 한 발, 거칠지 않고 춤을 추듯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두께 없는 칼날], 늘 새롭게 살아가요. 그것이 바로 생을 살리는 양생법(養生法)이지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세 번째 열쇠는 바로 자연스러움이에요. 넘치지 않고 중용의 길을 걷는 것, 그래서 삶을 살리는 도를 실천하는 것, 바로 그것이지요.


장자 Tip
1. 그대의 삶은 유한하다. 늘 그것을 명심하라.
2. 좋은 일을 했는가? 잊어라. 나쁜 일을 했는가? 되돌려라.
3. 극단을 선택하지 마라. 균형 잡힌 가운데 길을 걸어라.
4. 기술에 의존하지 마라. 자연에 의존하라.
5. 억지로 하려 하지 마라. 자연스럽게 삶의 속도를 따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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