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열쇠 : 쓸모없이 돼라

인간세(人間世)

by 김경윤

드디어 네 번째 관문에 들어섰네요. 네 번째 관문의 제목은 ‘쓸모없이 돼라’ 예요. 그런데 이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은 참 상대적이에요. 어떤 관점에서는 쓸모없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참으로 쓸모 있고, 그 반대도 성립하지요.

요즘은 학력과 스펙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보니 누구나가 쓸모있음을 추구하잖아요. 하지만 아래 제시문은 쓸모있음의 불운에 대해 말하고 있네요. 볼까요?


4-11

(……)

송나라에 형씨(荊氏) 들의 소국이 있었는데

가래나무, 잣나무, 뽕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그것이 한두 줌 이상 크면

원숭이 말뚝으로 베어 가고,

서너 아름이 되면

고관 집 용마룻감으로 베어 가고,

일고여덟 아름이 되면 귀인 부잣집의

널판짓감으로 베어 간다.

그래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도끼에 찍혀 죽고 만다.

이것이 쓸모 있는 재목들의 환난이라는 것이다.


나라의 동량(棟樑)이 되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곧게 자라 나무들은 쉬이 베어져서 원숭이 말뚝으로, 고관집 용마루로, 부잣집 널판짓감으로 쓰이지요. 고이 자라고 곧게 자란 나무일수록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지요. 장자는 이를 ‘재목(材木)들의 환난’이라고 말하네요. 쓸모가 있어 그 수명이 더욱 짧아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무의 쓸모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요? 본문을 보니 인간이 정하네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과 용도에 따라 정해져 버렸네요. 하지만 나무의 진정한 쓸모가 재목이 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푸르디푸르게 자라 자신의 후손을 더욱 번창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나무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에게 더욱 쓸모없어 보일수록 장수하게 되는 역설적 운명이 아닐 수 없네요.

그렇다면 이러한 운명이 비단 나무에게만 일까요? 인간이 자신의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단명하고 마는 것은 남에 의해 자신의 쓸모가 정해지기 때문 아닐까요? 쓸모가 있을수록 더욱 불행한 사태를 맞이하는 것 아닐까요? 속된 말로, “단물 쓴물 쏙 빨아 먹히고 버림당하”는 운명에 처하는 사람은 쓸모있는 사람들 아닐까요?


유용함의 관점에서 보자면 쓸모 있는 자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생명의 차원에서는 쓸모없음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의 지혜가 절실하네요.


4-12

예부터 액운을 제거하는 무꾸리를 할 때는

이마에 흰 점이 있는 소와

콧대가 높은 돼지와

치질병이 있는 사람은

하신(河神)의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무당들이 아는 바로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신인들은 반대로

그것들을 크게 상서로운 것으로 생각한다.

이름이 소(疏)인 불구자가 있었는데

턱은 배꼽에 숨고 어깨는 머리보다 높았으며

등덜미는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은 머리 위에 있었으며

두 넓적다리는 갈비뼈가 되었다.

바느질을 하고 빨래를 하여 호구는 넉넉했다.

점을 치면 쌀을 얻으니

열 식구를 족히 먹일 수 있었다.

나라에서 병사를 징집해도

병신은 팔을 흔들며 그 사이에서 노닐며,

나라에 큰 역사(役事)가 있어도

병신은 병이 있으므로 공역을 배당받지 않는다.

나라에서 병자에게 곡식을 내리면

쌀 세 가마와 열 묶음의 땔나무도 받는다.

대저 몸이 병신인 자도

족히 몸을 보양하고 천수를 다하거늘

하물며 병신이면서 덕인이면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장자는 말합니다. 쓸모없이 살아라! 정상인으로 살지 말고 병신처럼 살아라! 소(疏)처럼 그 몸이 병신이 자도 몸을 보양하고 천수를 다할 수 있는데, 그 마음이 병신인 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겠느냐?


천덕꾸러기 장애인이 이제는 삶의 모델이 되네요. 정상인들은 모두 징병으로 끌려가는데, 장애인은 멀쩡히 생활합니다. 정상인은 힘써 일해도 먹고살기 힘든데, 장애인은 나라의 혜택을 받아 그 목숨을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이런 진술을 하는 것을 보니 장자시대에도 장애인 복지가 있었나 봐요.


사실 장애라는 말 자체가 상대적인 개념이에요. 장애인이라는 말에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라는 뜻이 있는데, 그런 의미를 놓고 보자면 우리 모두가 장애인 아닌가요? 우리는 하루하루 폐를 끼치며 살잖아요. 아침에 출근하려면 아내에게 폐를 끼쳐야 하고, 출근하면서 운전사에게 폐를 끼치고, 숨을 쉬려면 공기에 폐를 끼치고, 밥을 먹으려면 식당주인과 종업원에게 폐를 끼치고……. 우리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1초도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요?


한편 장애는 조건에 따라 장애가 아니라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숲 속에서야 날개 달린 풍뎅이가 생존율이 높지만, 바람이 거세게 부는 바닷가에서는 날개가 퇴화된 풍뎅이가 생존율이 높아요. 이곳에서는 날개가 달린 풍뎅이는 거센 바람에 휩쓸려 죽음에 이르게 되지요. 운전을 하려면 손과 발이 필요하지만 참선을 하는 데는 손과 발은 필요없어요.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이처럼 상대적이지요.


장애로 손가락질받던 자가 장자에게는 추앙의 대상이 됩니다. 장자가 장애인을 예찬하는 것일까요? 그건 절대로 아니겠지요. 장자는 장애인의 예를 들어 사람을 정상/비정상으로 나누는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리하여 장자는 삶의 역설을 피력합니다. 자유롭고 싶은가? 장수하고 싶은가? 그 목숨을 보전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장애인이 되어라.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는가? 몸의 장애인도 이처럼 장수를 하는데, 마음의 장애인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잘난 체하지 마라. 차라리 어리석어져라. 아는 체 마라.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

휘황찬란한 사상이나 모습에 현혹되지 마라. 이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휩쓸리지 마라. 위험하다. 죽는다. 차라리 쓸모없이 돼라. 자유로운 삶을 위한 네 번째 열쇠를 얻게 되었네요.


장자 Tip
1, 쓸모없이 돼라. 그래야 진정한 쓸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장애는 장애자로 취급받는 상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의 관점에 있다. 장애인을 조롱하면 그대가 진짜 장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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