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大宗師)
보통 우리는 지식을 많은 사람을 지식인이라 하고 그들은 존경하는 대상으로 삼지요. 그러나 모든 지식이 삶에 유용한 것은 아니에요. 서양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삶의 양식을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누어 설명했어요.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세상에는 물질의 소유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로 작용되고 있지요. 그래서 “존재의 본질이 소유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처럼 전폭적으로 소유를 긍정하는 가치관은 아주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요.
에리히 프롬은 소유보다는 존재 쪽에 방점을 찍고 있어요. 다음을 볼까요?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간의 선택을 그들 각 체제의 중심적인 문제로 삼아 왔다. 석가모니는 인간 발전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누가복음 9:24~25)
위대한 스승 마이스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고 ‘비게’ 하는 것, 자신의 자아가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적(靈的)인 부(富)와 힘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가르쳤다. 마르크스는 사치는 가난 못지않은 큰 악덕이며, 우리의 목표는 풍성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흥신 문화사, 2008) 28~29쪽
이 소유와 존재 개념은 아주 유용한데요. 앎 역시 소유적 앎과 존재적 앎으로 나눌 수 있지요. 그때 우리는 노자가 말한 “지식은 쌓아하고, 지혜는 덜어간다.”는 명구를 존재적 앎에 대한 지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소유적 앎이 높이에 해당한다면 존재적 앎은 깊이에 해당하지요. 소유적 앎이 양(量)과 관련되어 있다면 존재적 앎은 질(質)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이 개념을 장자적으로 변용하면 인위적 앎과 무위적 앎으로 재정립되네요. 아래를 읽어볼까요.
6-4
사생(死生)은 자연의 명령이며
저녁 아침은 자연의 상도(常道)다.
이처럼 사람이 간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모두가 만물의 실존이다.
저들은 특별히 하늘을 아비로 여겨
몸처럼 사랑하거늘
하물며 그보다 탁월한 도를 사랑하지 않으랴?
사람들은 줄곧 군주를 자기보다 높다고 여겨
몸을 바쳐 죽기도 하거늘
하물며 그보다 참된 도를 사랑하지 않으랴?
샘물이 말라 고기들이 다 같이 육지로 나가
서로 숨을 불어주고 물거품으로 적셔주는 것은
강과 바다에서 서로 잊고 모른 척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요임금을 기리고 걸왕을 비난하는 것은
둘 다 잊고 자연의 도로 교화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대자연은 나에게 육체를 주어 짊어지게 하고
나에게 생명을 주어 수고롭게 하고
나에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좋다고 하는 것처럼
나의 죽음도 좋다고 한다.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못에 감추고
그것으로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 있는 자가 훔쳐 달아나 버릴 줄은
어리석은 자는 알 리 없다.
크고 적은 것을 감추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지만
오히려 달아날 곳이 있다.
만약 천하를 그 천하 속에 감춘다면
훔쳐 달아날 데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항구적인 사물의 큰 이치인 것이다.
유독 인간의 형체를 주조한 것을 기뻐하는데,
사람의 형체란 만 가지로 변화하여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니,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좋은 생각일까?
그러므로 성인은
만물을 훔쳐 달아날 수 없는 천하에 노닐어
모두를 보존케 하며,
요절도 늙음도 좋게 하며, 시작도 끝도 다 좋게 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성인을 본받으려 하는데
하물며 만물이 매여 있고
한결같은 조화의 의지적인 도를 본받지 않겠는가?
우선 저는 이 구절에 눈에 띄네요.
“샘물이 말라 고기들이 다 같이 육지로 나가
서로 숨을 불어주고 물거품으로 적셔주는 것은
강과 바다에서 서로 잊고 모른 척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요임금을 기리고 걸왕을 비난하는 것은
둘 다 잊고 자연의 도로 교화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아야 해요. 그것이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그런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와 서로를 측은히 여기며 서로 숨을 불어주고 물거품으로 적셔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러한 행위가 보기에는 아무리 숭고해 보일지라도, 물속에서 서로를 잊고 자유롭게 노니느니만 못한 거지요.
국민을 자연스럽게 살게 하지 못하고, 이것이 옳네 저것은 그르네, 여기를 따라가야 하네, 저기를 좇아가야 하네, OO당이 맞네, XX당은 틀리네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그때의 앎과 내용과 가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자연의 법도에서 어긋난 모든 인위적 장치(제도, 정치, 문화, 교육, 종교 등)는 결국 물고기를 물 밖에서 살게 만드는 위험한 것일 뿐이에요.
사람들은 부유하게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식이 필요한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술(앎)이 필요한가? 좀 더 편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등등 수많은 고민을 하고 그 고민을 현실화시키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근본적 질문을 하지 않아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장자는 이 질문에 담담히 말하지요.
“대자연은 나에게 육체를 주어 짊어지게 하고
나에게 생명을 주어 수고롭게 하고
나에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좋다고 하는 것처럼
나의 죽음도 좋다고 한다.”
죽고 사는 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에요. 이 흐름에서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지요. 삶이 조금 더 연장된 들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아름다움이 조금도 유지된 들 무슨 보탬이 되겠어요? 나의 삶이 좋으면 나의 죽음도 좋은 거지요. 나무를 보세요. 모든 것을 털어내야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저 ‘천하 속에 천하는 감추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거지요. 장자가 이야기하는 자연의 도를 따르는 무위적 앎이 매력적이지 않나요?
그러한 무위적 앎을 따를 때, 이 세상의 인위적 앎은 그 가치를 상실하게 돼요. 다음을 보세요.
6-12
안회가 말했다. “저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엇을 말하는가?”
안회가 답했다.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잘했다. 그러나 미진하다.”
뒷날 안회는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슨 진전인가?”
안회가 답했다. “저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잘했다. 그러나 미진하다.”
뒷날 안회는 다시 공자를 알현해 아뢰었다.
“진전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슨 진전인가?”
안회가 답했다. “저는 좌망(坐忘)에 들었습니다.”
공자가 움찔하면서 말했다.
“좌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안회가 말했다.
“육신을 벗어나 총명을 물리치고
형체를 떠나 지혜를 버리고
큰 통철(洞徹)함에 대동(大同)함을 일러 좌망이라 합니다.”
공자는 말했다.
“대동하면 호오(好惡)가 없고 조화하면 상집(常執)이 없으리니 과연 진실로 어질도다!
나도 네 뒤를 따르고 싶다.”
공자와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 안회가 대화를 나누네요. 안회의 상태를 공자가 점검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전되는데요. 먼저 안회는 인의(仁義)를 잊고, 다음으로는 예악(禮樂)을 잊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공자가 “아직 미진하다”라고 응수해요. 인의와 예악이야말로 공자학파가 주장하는 사상의 핵심개념인데, 그것을 잊었다고 하는 것은 공자학파에서 벗어났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도 아직은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지요.
그러다가 안회가 좌망(坐忘)에 들었다고 하자, 공자는 좌망에 대하여 물은 후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해요. 스승과 제자의 위치가 역전된 셈이지요. 도대체 좌망(坐忘)의 경지가 어떠한 것이기에 스승인 공자가 자신의 자리마저 내어주려고 했을까요?
그 내용인 즉, “육신을 벗어나 총명을 물리치고, 형체를 떠나 지혜를 버리고, 큰 통철(洞徹)함에 대동(大同)함”을 일러 좌망이라 하네요. 육신과 형체를 떠났다는 것은 세상을 분별하는 자아를 버렸다는 이야기가 돼요. 그리고 총명을 물리치고 지혜를 버렸다는 것은 그 분별하는 자아가 만들어낸 분별심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나를 잃고 지식도 잃었다”는 거지요.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인위적 지식을 버리게 되면, 세상과 대동(大同)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지요.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 앎은 좋고 나쁨[好惡]과 옳고 그름에 대한 고집[常執]에서 놓여 나게 돼요.
장자에게 망(忘)은 아주 중요한 개념인데요. 한자를 쪼개 보면 죽을 망(亡)에 마음 심(心)이 결합되어 있지요. 마음이 죽은 거예요. 자신 안에 갇혀서 자신만의 아집으로 세상을 요리보고 조리보는 옹졸하고 협소한 생각이 완전히 살아진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왜 하필 좌망(坐忘)일까요? 그러니까 앉아서 잊어야 한 하는 걸까요? 일어서면, 걸으면 안 되나요? 안 될 것은 없지요. 책상머리에 앉아야만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모으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랫동안 한결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앉음[坐]이에요. 한자사전에는 이 좌(坐)를 ‘앉다.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 무릎 꿇다’ 등의 뜻이 있다고 써놨어요. 그러니까 앉음은 ‘무목적의 자세, 자기를 항복시키는 자세’를 뜻하기도 하지요. 기도의 자세가 바로 이런 자세지요.
기도해보셨나요? 우리는 보통 기도라면 신에게 우리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기도의 본질은 ‘나를 버림’에 있어요. 나를 버려야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요. 자연에 들어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서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무슨 소리가 들리나요? 그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세요. 그것이 곧 기도지요. 이러한 기도에 동참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에 도달하는 여섯 번째 열쇠를 갖게 된 겁니다.
장자 Tip
1. 우리 삶의 목표는 풍성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2. 나의 삶이 좋다면 나의 죽음도 좋다고 생각하라.
3. 인위적 지식을 버리고 무위적 지식에 도달하라.
4.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기도는 자신을 잊고 자연(=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