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론(齊物論)
인류의 지혜문명사를 보면 최상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자신을 강화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잃은 사람입니다. 자아(self)라는 미망(迷妄)에서 벗어나, 더 큰 자아(Self) - 장자의 개념으로는 지인(至人)에 도달한 사람들 –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자신을 잃는 것이지요. 아래 본문을 볼까요?
2-1
남곽의 자기는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
하늘을 우러러 숨은 쉬며, 멍하니 몸을 잊은 듯했다.
제자인 안성 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있다고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몸은 꼭 마른 고목 같고
마음은 꼭 죽은 재처럼 하고 계시니…….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의 선생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아! 훌륭하구나! 그것을 질문하다니.
지금 나는 내 몸을 잃었다.[吾喪我] 너는 그것을 아느냐?
아마 너는 사람의 음악은 듣지만 땅의 음악은 듣지 못하고
땅의 음악은 듣지만 하늘의 음악은 듣지 못하는 것 같다.”
본문을 보면 스승인 자기와 제자인 안성 자유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제자가 어느 날 스승의 모습을 보았더니,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의 선생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진술에서 안성 자유의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지요. 그때 스승은 제자의 발견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지금 나는 내 몸을 잃었다.” 한문으로는 오상아(吾喪我)라고 말하지요. 여기서 상(喪)은 ‘죽다, 잃다’라는 뜻이에요. 장자에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망아(忘我), 심재(心齋) 등이 그러한 것들이에요. ‘나를 잊다’, ‘마음을 굶기다’라고 해석하지요.
불교에서도 이러한 경지를 최상의 경지로 여겼지요,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지요. ‘나’라는 것을 실체(substance)로 여기는 아집에서 벗어나, “나란 없다”는 경지에 도달하는 자만이 불교의 핵심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기독교에서도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따르라고 명령했어요.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고백하기도 했고요.
우리는 자유의 조건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나’라는 생각이 고착되면 고통이 따르게 돼요. 그래서 그 ‘나’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집착, 분노, 어리석음 등의 상태에 놓이게 되지요.(불가의 이론) 그러나 그 ‘나’를 버리면, 공포와 고통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행복과 자유가 따른다고 지혜자들은 전하지요.
현대의 영성가 데이비드 호킨스(David R. Hawkins)는 이러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어요.
“에고가 무(無)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존재에 매달릴 때 공포의 순간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에고가 죽자, 무가 되는 대신 그 자리에는 ‘일체임Everythingness’, ‘전부All’로서의 참나가 들어섰습니다. 그 속에서 일체는 자신의 본질의 완벽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고 자명합니다. 비국소성과 더불어, 사람은 항상 존재해 왔고 혹은 존재할 수 있는 전부라는 앎이 왔습니다. 사람은 모든 정체와 성별을 넘어, 심지어는 인간 존재 자체를 넘어서 전체적이고 완전합니다. 다시는 괴로움과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나’라고 할 것에 집착하지 않아요. 그러하기에 전혀 다른 차원에서 타자(他者)와 만날 수 있게 되지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타자가 변화되기를 원하잖아요.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식, 아내(혹은 남편)의 뜻을 따르는 남편(혹은 아내), 상사의 말에 순종하는 부하직원 등 일방통행의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자신을 잃은 사람은 자신의 삶의 조건 속에서 늘 타자와 하나가 되려고 해요. 아래 예를 보시지요.
2-7
신명을 수고롭게 하며 한쪽을 좋다고 하면
그것이 크게는 같다는 것[大同]을 모른다.
이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원숭이 주인이 아침먹이로 알밤을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성을 냈다.
이에 주인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명(名)도 실(實)도 덜어낼 것이 없는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이것은 기호(嗜好)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를 화합하여
하늘의 자연균형에 머물게 한다.
이것을 ‘양행(兩行)’ 즉 ‘양시론’이라 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일화가 바로 장자에서 유래한 거네요. 이야기는 간단해요. 자신의 원숭이들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주인, 그런데 그러한 호의에 도리어 화를 내는 원숭이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일반적으로 주인의 반응은 간단하지요. 호의를 철회하거나, 원숭이를 혼내주거나.
하지만 주인의 모습을 보세요. 자신의 판단을 거두고, 즉 자신을 죽이고, 원숭이에게 새로운 제안을 해요. 그 제안은 주인에 입장에서 보면 원래의 제안과 그리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두 번째 제안에 원숭이들은 모두 좋다고 해요.
여기까지 오면, 일반적으로는 주인이 참 영악하다든지, 원숭이들이 참 어리석다든지 하는 판단을 내리게 되잖아요. 그러나 이 이야기의 참된 결론은 그것이 아니에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명(名)과 실(實)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호(嗜好)이기 때문에, 주인에 입장에서 보면 화낼 것도 좋아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인의 태도를 ‘시비를 화합하여’ ‘하늘의 자연 균형[천균(天均)]’에 머무는 ‘양시론[양행(兩行)]’이라고 말하지요.
주인의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 원숭이의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 중 둘 중에 하나만으로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균형 잡힌 입장에서 보자면, 옳음-그름이 아니라 옳음-옳음이 되지요.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라, 윈윈(win-win) 게임이 되는 거지요. 기회주의자의 양시론이 아니라, 자기를 버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양시론이에요.
2-12
(왕예의 말) “잠깐 그대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자.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 병이 걸려 죽을 수도 있으나
미꾸라지도 그런가?
사람은 나무 위에 오르면 무서워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그런가?
이 셋 중에서 누가 올바른 거처를 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만
사슴은 꼴을 먹고
지네는 뱀을 잘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아한다.
이 넷 중에서 누가 올바른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가?
원숭이와 수달은 어미를 암컷으로 삼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닌다.
사람들은 모장과 여희를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녀를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들이 그녀를 보면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와 사슴이 그녀를 보면 반드시 달아난다.
이 넷 중에서 누가 올바른 미색을 안다고 생각하는가?
내 관점으로는
인의의 단서와 시비의 갈림길이
어지럽게 얽혀 있으니
내 어찌 그 분별을 알겠는가?”
이렇게 자기를 버린 자는 이제 이전에 한 자신의 판단이 자신의 좁은 틀 속에서 만들어진 아집(我執) 임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하여 분별심(分別心)을 버릴 수 있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지요.
불가에서도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분별심이에요. 내 것, 내 생각, 내 가치, 내 사상, 내 삶이 기준이 되어, 내 것은 옳고 남의 것은 틀리다는 생각, 이것과 저것을 나의 잣대로 판단하려는 생각이 바로 분별심이지요.
위의 인용문을 보세요. 장자는 왕예의 입을 빌려, 사람과 미꾸라지, 원숭이의 잠자리를 비교해요. 사람과 사슴과 지네와 올빼미를 견주어 음식을 비교하지요. 또한 원숭이, 고라니, 미꾸라지와 사람을 견주어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요.
그를 통해 각득기의(各得其宜)라! 각자가 각기 마땅함에 처해있다는 평범하지만, 비상한 지혜를 전달하려 해요. 삶의 태도에 있어서의 비교불가능성, 독자성,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만을 옳다고 생각하는 당대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은 거죠.
참다운 자유를 원하세요? 그렇다면 우선은 자신을 잃을 일이에요. 자신의 생각(판단)을 일단 괄호 치세요. 서양 현상학에서는 이를 에포케(epoche), 즉 ‘판단중지’라 하지요.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세상을 마음을 열어보세요. 거기에 우리와는 다른 아름다운 세상이 각기 아름답게 제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나-없이-사는-삶’은 나의 소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나-열림’으로, 그리하여 ‘나-너의- 소통’으로,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가 그 자리에 엄연히 완전하게 존재한다는 것, 그리하여 ‘나-우주되기’라는 나의 무한 확장으로 펼쳐지지요.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요?
장자 Tip
1. 진정 그대를 발견하고 싶다면, 그대를 잃어라. 그대를 잃는 것이 절망적인 상태가 아님을 기억하라.
2. 존재의 열림 속에 자아가 확장됨을 느껴봐라. 그대는 우주의 일부이며, 타자 또한 그러하다. 그대와 타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3. 갈등이 생기거든, 그대의 생각을 잠시 멈추라. 하늘의 관점에서 그 갈등을 바라보라. 의외로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다.
4. 모든 존재가 비교불가능하고, 독자적이며, 고유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설령 그대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5. 분별심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 만드는 것임을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