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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r 05. 2020

들어가며 1 : 부처의 생애

부처의 생애 : 고타마 싯다르타에서 붓다로

1. 

보통은 부처, 또는 붓다(Buddha)로 알려진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 BC563년~BC483년)는 사카족의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고타마가 씨족의 성이고, 싯다르타가 이름인데, 뜻은 ‘목적을 이룬 사람’이지요. 그가 깨달음을 얻은 후 사람들은 그를 석가모니(釋迦牟尼:Sakya-muni)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카족의 성자’라는 뜻입니다.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하얀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답니다.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아래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고 외쳤다는데, 이 사건이 사실이 아닌 것이야 확실하지만, 종교지도자의 탄생치고 좀 거창하다 싶습니다. 

후에 예언자 아시타는 이 어린 싯다르타를 일견하고 나서 이상적 군주가 되든지, 부처가 될 것이라 말하여 왕국을 물려주려는 왕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아들이 종교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 계절마다 번갈아 기거할 수 있는 3개의 궁전을 지어주고, 4천(혹은 4만) 무희들을 보내어 온갖 즐거움을 선사했으며, 16살에는 아쇼다라라는 예쁜 공주와 결혼도 시켰지만, 싯다르타의 운명은 아비의 기대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싯다르타는 궁 밖으로 나가 인도민중들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없앨 방법을 찾아 출가하게 됩니다.      


2.

무릇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아무리 심오한 종교적 탐구라 하더라도 이 단순하고 근본적인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이 질문에서 벗어난 종교는 이미 현실성을 상실한 시대착오적인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세속적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고통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니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건강, 경제적 부, 사회적 명성, 정치적 권력의 획득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거지요.

    그러나 부처의 깨달음은 이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아야겠어요. 부처가 궁에서 떠날 때,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라훌라, 뜻인즉 ‘걸림’이에요. 자식을 자신이 가야할 길에 걸림돌로 보았으니 자식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섭섭했겠네요. 아내와 아이가 자는 틈을 타 궁 밖을 나선 싯다르타는 힌두교의  여러 스승을 만나 수행하지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온갖 수행법과 고행을 통해 수행한 지 6년이 지나자, 싯다르타는 극단적인 고행방법을 통해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지나친 쾌락이 위험한 것처럼 지나친 고행도 중도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마치 악기의 줄을 너무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풀면 소리가 나지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3.

고행을 마치고 우루벨라 마을로 내려온 싯다르타는 수자타라는 여인이 제공하는 유미죽을 얻어먹고 체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요히 명상할 곳을 찾던 중 핏팔라나무(보리수:깨달음의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용맹정진에 들어가지요.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당하듯, 싯다르타는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음의 신 마라[魔王]에게 세 가지의 시험을 당합니다. 첫째 시험은 엄청난 마군을 몰고 와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시험은 부처가 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은 마라의 아름다운 딸들을 동원하여 육체적으로 유혹하는 것이었지요. 이 모든 시험을 이기고 싯다르타는 드디어 “무지는 사라지고 앎이 떠오르며,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떠오르는” 경지의 확연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성불(成佛)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지요.

하지만 부처는 이 깨달음은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을 지 망설이게 됩니다. 너무도 심오한 경지는 쉬 전달되지 않고, 삶에 바쁜 이들은 이 깨달음을 반기지 않을 듯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들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드디어 가르침의 길에 나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 하나를 더 깨닫습니다. 아무리 종교적 진리가 심오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반인에게 소통되지 않는 깨달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세상을 외면하는 종교,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을 추구하는 종교, 자신들만이 아는 언어로 벽을 쌓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닌 셈이지요.     


4.

    부처의 최초의 가르침은 이전에 자신이 만났던 스승과 같이 고행을 했던 동료들에게 향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처를 거부했던 동료들은 그의 가르침의 심오함에 빠지고 됩니다. 가르침의 핵심인 듯, 제법무아(諸法無我). “생하는 것은 모두 멸하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동일성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존재는 가합적(假合的)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에 따르면 영원한 진리니 실체니 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탐구하는 행위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자아'[진아(眞我:Atman)]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아가 없음’[무아(無我:Anatman)]이야말로 앎의 정수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앎의 경지는 일반 대중에게는 쉽게 전달될 수 없음을 느끼고, 일반대중을 위한 가르침을 따로 마련하니, 그것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우선 고제(苦諦)는 괴로움의 진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현실적인 진단이지요. 둘째, 집제(集諦)는 이러한 고통이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셋째, 멸제(滅諦)는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고통이 없는 경지, 즉 니르바나(nirvana)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마지막으로 도제(道諦),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바른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道]를 구체화한 것이 바로 팔정도지요.

팔정도(八正道)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 바르게 말하고[正言], 남에게 해코지하지 않고[正業], 좋은 직업을 가지며[正命], 마음을 늘 건전하게 유지하고[正精進], 바르게 살펴[正念], 그곳에 마음을 집중하라[正定]는 방법론이지요. 이러한 수양법은 비단 승려들만이 지켜야할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으려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생활지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늘 성찰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무슨 아름다운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5.

부처는 이러한 깨달음은 널리 전하면서 불교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 불교공동체를 일컬어 ‘상가(sangha)'라 불렀는데, 이는 한자로 음역되면 승가(僧家)가 되는 것이지요. 부처의 공동체는 도시로부터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장소를 구하고 걸식과 명상과 가르침으로 공동체를 운영해갑니다. 부처 역시 몸소 걸식을 행함으로 무소유(無所有)을 실천합니다. 진정한 깨달음 이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이 도저한 경지가 바로 불가의 정신인 것이지요.

부처는 깨달음 후 45년간을 가르치다가 80세에 열반에 듭니다. 부처 사후 제자들이 모여, 부처님의 말씀과 해석, 승가의 행동원칙 등을 정리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三藏)이 되었지요. 이후 불교는 부파불교, 대승불교 등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신해갔고, 비록 인도에서는 점점 쇠퇴되어갔지만,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다양한 전통을 형성하게 됩니다.      


6.

특히 중국에서 형성된 선(禪)불교의 전통은 깨달음 이외에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심지어는 부처나 스승의 권위마저도 깨달음을 위해서는 의심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시면 어떠셨을까요? 자신이 구성한 종교가 자신을 죽이는 이 역설적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이 도저한 부정의 정신이야말로 부처가 깨달은 무아(無我)의 경지의 다름 아닌 셈이지요.      

<금강경> 6장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그 유명한 뗏목의 비유인데요. 진리를 가르치는 말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일 뿐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을 절대화하게 되면 또 다른 집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마치 강을 건넌 후 뗏목을 이고 가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는 셈이지요.      


7.

<금강경>은 이렇게 끝납니다.     

모든 지은 법이여!(一切有爲法)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如夢幻泡影)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如露亦如電)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應作如是觀)     


또한 부처도 자신의 임종을 맞으며 이러한 유언을 남기셨다 합니다.     

"나아가라, 게으르지 말고 나아가라, 부지런히 나아가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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