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이 지겹다고요? 차라리 안정적으로 반복이라도 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청춘이 아닐까요? 직장을 다녀도 언제 짤릴까 불안하고, 안 다니면 남의 눈치 보랴 걱정인 것이 요즘 세대입니다. 시간이 흐르는데 세상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안 좋아지네요. 이 힘겨운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흘러가는 세월과 늙어가는 인생이 안쓰러울 때에는 젊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청춘의 특권을 기억하며 다시금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제가 꼽는 청춘의 책 넘버원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니체의 책이야말로 고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고, 심연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젊음의 특권은 아무리 높은 곳일지라도 용기를 내서 도전하고,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힘을 내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책은 젊습니다. 불꽃이고 망치고 다이너마이트 같은 니체의 책을 읽노라면, 어느덧 젊은 시절에 꿈들이 살아나고, 주먹이 쥐어지고, 가슴이 뜁니다. 한껏 젊어집니다.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춤추는 자, 니체
이번의 주제는 ‘변신하라’입니다. 그리고 변신의 철학자는 단연 니체지요. 니체야말로 그의 짧은 생애 동안 변신에 변신을 추구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성취에 잠시도 머물지 않고 광기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비판하고 자신의 저술을 폭풍처럼 써 내려갔습니다. 세상의 평가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세상을 조롱이나 하듯 웃으며 넘어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입니다. 그의 자부심과 오만함이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의 자부심과 오만함은 무겁지 않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춤’입니다. 춤이야말로 그의 철학적 입장의 대표하는 용어지요.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러고 나의 악마 이야긴데 나는 그가 엄숙하며, 심각하고, 심오하며 당당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력의 악령이었던 것이다. 저 악마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노여움이 아니라 웃음으로써 살해를 한다. 자, 저 중력의 악령을 죽이지 않겠는가!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줄곧 달렸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가볍다. 나는 날고 있으며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야 어떤 신이 내 몸속에서 춤을 추고 있구나.”
춤추는 철학자, 니체! 그의 책이 산문에서 시로, 시에서 산문으로 자유롭게 변용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가 춤추듯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중력을 조롱이나 하는 듯 비상하는 발레리나의 가벼운 춤사위를 보면, 나 역시 그와 함께 비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니체의 글은 사람을 춤추게 합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가벼움을 원합니다. 변신과 비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가벼움입니다. “무거운 것 모두가 가볍게 되고, 신체 모두가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게 알파이자 오메가라면, 진정,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알파이자 오메가렷다!”
세 단계의 변화
무거움을 털어버리고 가볍게 춤을 출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준비운동이 모두 끝난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변신할 때입니다. 세 단계의 변신!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다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첫 번째 변화는 낙타입니다. 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겠네요. 낙타의 특징은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마다하지 않고 운명으로 여기며 모두 짊어진다는 것이지요. 그가 걷는 곳은 사막입니다. 아무런 생명도 없는 장소, 조금만 잘못하면 죽음에 도달하는 삭막한 장소.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관습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군상을 닮지 않았나요?
현대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입니다. 문제는 이 개인주의 사회가 개성이 넘치는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라, 몰개성의 군중 속의 개인주의 사회라는 점이겠지요. “나는 나”라는 광고가 개성을 강조하지만 그때의 개성은 상품 소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개성입니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비싼 상품을 소비하지만, 자신만 그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만에 비싼 옷을 사 입고 밖으로 나가보니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넘쳐나고 있음을 목격했을 때의 그 낭패감이란!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무척이나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가 결국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형 인간의 낳고 말았습니다. 개성을 강요하지만 개성은 사라져 버린 시대가 현대사회 아닐까요? 게다가 그 개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용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낙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낙오하지 않는 낙타가 되어야지요.
낙타의 정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하게 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결코 사막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더 주의해야 할 점은, 낙타가 사막을 걷다 보면, 낙타가 가는 곳이 사막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몰개성적 노동이 상품 소비를 낳고, 다시 새로운 소비를 하기 위해 몰개성적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운명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이 낙타의 삶은 몰개성적 노동과 상품 소비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기준을 상실한 군중 속의 개인은 삶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외부와 대조해보아야 합니다. 그때 개인에게 강력한 기준이 되는 것이 메스미디어(대중매체)입니다. 자신의 삶이 시대착오적이지는 않는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무지하지는 않은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대중매체이고 보면, 대중매체야말로 현대인에게 현대판 신전(神殿)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늘씬하게 빠진 몸매와 잘 생긴 외모, 세련된 말투, 그리고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연예인들은 신전에 살고 있는 만신(萬神)의 역할을 하지요.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해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유명인들을 보면 행복의 전령사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헤르메스이지요. 그들이 세워놓은 표지판과 삶의 방식에 따라 맹목적으로 살다가 보면 도달하는 곳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재확인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낙타는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적어도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두 번째 변화는 사자입니다. 낙타가 노예라면, 사자는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려는 주인입니다. 사자가 진정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배해온 주인과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로마시대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을 살해해야 하는 것처럼, 사자는 용(신)과 대결합니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나는 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택합니다. 그리하여 사자는 자유를 쟁취합니다.
가깝게는 촛불혁명이, 조금 멀게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사자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피폐해지고 사회적 모순이 극렬하게 드러나는 시기에 우리는 무력한 군중이 아니라 각성된 대중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한 모습의 결과가 실패로 나타나든 성공으로 확인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에 놀라고, 우리의 변화에 흥분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내용을 자유롭게 선포할 수 있다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거대한 물결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낡은 제도와 권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광도 잠깐, 어느새 낙담한 표정과 무기력한 몸짓으로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저항의 정신은 다시 수면 속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거부의 몸짓이 자기 변신에 철저하지 못할 때, 우리는 순응하는 삶으로 회귀합니다. 요즘 말로 ‘멘붕’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끝나야 하는 걸까요?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니체가 제시하는 최종적 변화는 어린아이입니다. 의외입니다. 왜 하필 어린아이일까요?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유희정신과 창조정신입니다.
먼저 유희정신. 아이들과 어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놀이를 할 때에 드러납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놉니다. 승패를 가르는 놀이도 있지만, 그 승패가 아이들의 인생을 심각하게 흔들어놓지 않습니다. 이번 판에서 지더라도 다음 판에서 이기면 됩니다. 또 지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른들이 보기에 한심해 보일 정도로 반복적인 놀이를 하면서도 아이들은 그저 즐거워합니다. 그 순간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에게 놀이는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승부에 집착합니다.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이기니까 즐거운 것이고, 지면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놀이는 도박에 가깝습니다. 놀아도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뭘 걸고 놉니다. 승자승(The winner takes it all)의 원칙을 늘 확인합니다. 아이들의 놀이가 순진무구함의 표출이라면 어른들의 놀이는 승부 욕망의 발로입니다. 아이들은 이전의 놀이 결과를 잊지만, 어른들은 잊지 않고 앙갚음하려 합니다. 아이들의 놀이가 새로움이라면 어른들의 놀이는 집착입니다. 아이들은 과정을 긍정합니다. 어른들은 결과를 중시합니다. 아이들은 놀이에 져도 개의치 않지만, 어른들은 놀이에 지면 집착합니다.
다음으로 창조정신. 아이들의 장난감 놀이를 구경해보면, 만들 때는 온 신경을 쏟아서 만들었다가 정작 만든 후에는 애써 만든 것을 부숴버립니다. 새로운 장난감이 나오면 떼를 써가며 사달라고 하지만, 정작 사주면 며칠 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잊어버립니다. 아이들은 과거에 얽매여있지 않습니다. 그저 현재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자신이 부숴놓은 장난감으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창조는 파괴를 전제로 한 창조입니다. 아이들은 결코 한 결과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아이들은 전쟁의 폐허더미에서 놀잇감을 구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신이 쌓아놓은 것을 부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과거가 온전히 담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창조보다는 축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파괴를 낳는 창조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멀리 합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정당화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어른들이 걸어온 길을 걷는 것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누가 조금이라도 훼손할라치면 화를 내고 무시하고 겁을 냅니다. 창조를 외면하고 경험을 중시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만을 걷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낡은 것, 오래된 것, 안정적인 것을 희구하기 때문에, 새것, 새로운 것, 불안한 것을 참을 수 없어합니다. 변화와 혁신, 혁명을 두려워합니다.
니체의 동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수없이 많은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미 위에서 우리는 낙타와 사자를 봤네요. 차라투스트라의 곁에는 독수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의 목에는 뱀이 감겨있지요. 차라투스트라를 상징하는 두 종류의 동물, 독수리와 뱀. 뱀은 영원한 시간을 상징합니다. 유한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시간이 뱀입니다. 영원회귀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한편 독수리는 최고도로 비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중력을 뚫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독수리는 차라투스트라의 분신과 같은 동물이지요.
이 외에도 비상을 할 수 있도록 질주하는 말은 춤추는 무희와 같은 고귀한 동물이지요. 하지만 말처럼 빨리 달리지만 결코 날 수 없는 타조와 같은 동물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타조는 가장 빠른 말보다도 더 빨리 달린다. 그런 그도 아직은 머리를 무거운 대지 속에 무겁게 처박고 있으니,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날지를 못하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날지 못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무겁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삶이 가볍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소중한 것이고 애써 가꿔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땅을 딛고 굳건히 일어서야 하는 것이지요. 니체는 그러한 능력을 변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삶에 굴종할 것인가,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지요. 허황된 꿈을 꾸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변화가능성을 깨닫자는 이야기지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과 태도를 바꾸어야겠지요. 니체가 질주하는 동물과 비상하는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중력의 악령에서 벗어나기
위의 인용구를 보면 ‘중력의 악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반쯤은 난쟁이고 반쯤은 두더지인, 절름발이이면서 절룩절룩 거리게 만드는 저 중력의 악령이 내 등에 올라와 있었고, 그가 나의 귀 속으로 무거운 납을, 나의 뇌 속으로 납덩이같은 사상을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 지혜의 돌이여!” 그는 비웃듯이 한 마디 한 마디 속삭였다. “너 위를 향해 네 몸을 높이 투척했지. 위로 던져진 돌은 어김없이 도로 떨어지게 마련이거늘!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 지혜의 돌, 투석용 돌이여, 별조차 깨부수는 자여! 너 네 자신을 그토록 높이 투척했던 것이다. 위로 던져진 돌은 어김없이 떨어지게 마련이거늘!
그는 삶을 조롱하는 자이며, 낙담을 조장하는 자이며, 온갖 비상의 시도를 비웃는 자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상이라고? 변신이라고? 세상이 그렇게 녹록할 것 같은가? 그대의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고 무용한 것이네. 그러니 비상이니, 변신이니 따위는 잊어버리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버티는 것이 어떤가. 그대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위로 던지는 돌은 언젠가는 떨어지듯이, 비상은 추락을 위한 예비동작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남김없이 용기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의 온갖 낙담을 남김없이 제거해온 용기가. 그 용기가 마침내 내게 멈춰 서서 말하도록 명했다. “난쟁이요! 너! 아니면 나다!” (……) 공격적인 용기는. “그것이 생이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용기를 내랍니다. 과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더라도, 그건 그대로 인정하라네요. 하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말라고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생이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용기는 만용과는 다릅니다. 만용은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리는 허황된 몸짓이라면, 용기는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한 상태에서도 굴하지 않고 보여주는 불굴의 의지입니다.
만약에 인생이 끊임없이 같은 것만 반복되는 ‘동일성의 반복’이라면 삶의 변화는 없겠지요. 하지만 인생은 반복이 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의 반복’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은 날이 아니듯이, 우리의 삶은 의미 없는 무한 반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실패가 오늘의 실패가 아니듯이, 과거에 얽매이는 삶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겠지요. 니체의 변신 이야기는 바로 새로운 삶을 용기 있게 시작하라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연을 즐겨라
인과율이라는 말이 있지요. A라는 원인이 주어지면 반드시 B라는 결과가 도출될 것이라는 법칙 말입니다. 세상이 온통 인과율의 법칙에 따른다면, 새로운 것은 하나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오늘 떠오른 태양은 어제 떠 오른 태양이 아닙니다. 우리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말합니다.
“모든 사물 위에 우연이라는 하늘, 천진난만이라는 하늘, 뜻밖이라는 하늘, 자유분방이라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 내가 이렇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축복일망정 모독은 아니다.
“뜻밖에.”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유서 깊은 귀족이다. 그것을 나 모든 사물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렇게 하여 나 모든 사물을 목적이라는 것의 예속 상태에서 구제해준 것이다.
모든 사물 위에는 우연이라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는 말이 용기가 됩니까? “뜻밖” 인가요? 니체는 이 “뜻밖에”가 유서 깊은 귀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신성한 우연이라는 것이 춤을 추는 무도장이며 신성한 주사위와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자를 위한 신의 탁자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사위 놀이를 해보셨나요? 주사위 놀이가 낯설다면 윷놀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윷놀이의 승패는 필연적이지 않아요. 처음에 던진 말이 윷놀이 전체를 규정하지도 않지요. 언제든지 역전이 가능하고 판을 새로 시작할 수 있지요. 하늘의 던져진 윷들이 조합이 도가 될지, 개가 될지, 아니면 걸이나 윷이나 모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요.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러니 춤을 추는 무도장에 있다는 마음으로 춤추듯이 삶을 살아갈 일이에요. 두려움 없이요.
용기를 주는 시 한 편 소개하려 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자(Alfred D. Suja)의 시입니다.
“춤추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