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등산의 묘미는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신체적 구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현재 다소 뚱뚱하다.) 산을 오르며 헉헉대는 나의 모습이 그리 달갑지마는 않다. 어린 아이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는 경사진 산길들이 나에게는 참으로 고문이다. 정상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달라지지 않는다.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는 기쁨도 잠시 잠깐이다. 아무리 기쁘다고 하더라도 정상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보면 나는 애당초 정복욕이라든지 성취감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부족한가 보다. 내려가는 길이 덜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올라가는 길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그리고 무사히 평지에 도착하면, 시원한 막걸리와 맛있는 안주들이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한다.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인생이 단 한 번에 등산이라면 힘써 올라가야할 시기가 있고, 천천히 내려와야할 시기도 있다. 인생을 80으로 치자면 40대까지가 등산의 시기이고, 50대부터는 하산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등산의 시기가 신발 단단히 매고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가야하는 시기라 힘들고 고달프다. 그러나 하산의 시기는 먹을 것 다 먹고 조금은 가볍게 내려오는 시기라 편안하다. 적어도 나는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중년들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내려놓아야할 시기인데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마음은 무엇일까? 내가 만든 마음일까? 아니면 이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는 마음일까? 아니며 둘의 합작품? 인간의 수명이 길어져서 그럴까?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변변치 않은 현실에 대한 원망 때문일까? 정확한 답을 찾기 참으로 힘들다. 아니면 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나 하는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끝은 분명하다. 인간은 언젠가 분명히 죽는다. 중국대륙을 호령한 진시황도 이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할 일이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그러니 적절한 시기에 내려올 준비를 해야한다. 무턱대고 오르기만 하다가 해는 서산에 기울고 절벽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급전직하(急轉直下) 낭떠러지에서 장엄하게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만 그리 권장할만한 죽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황혼을 맞이하는 것이 축복이리라.
너무 나갔다. 아직 우리는 죽을 때가 아니니까, 죽음의 이야기는 그만 하자. 춘추 전국시대에 늙은 지혜자老子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쌓아가는 것이고, 지혜는 줄여가는 것”이라고. 인생에는 축적의 시기가 있고, 나눔의 시기가 있다. 젊은 시절에는 먹고 싶고 알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好奇心호기심이라는 한자가 재미있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젊었으니까 그랬겠지. 갓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듯, 세상을 얼마나 기인한 것 투성이었을까. 앎도 그러했다. 알면 알수록 알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책을 밥 먹듯이 읽어댔다. 아무리 읽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세상을 해독할 단 하나의 대문자를 발견하고 싶었다. 삶의 유일한 원리를 찾고 싶었다. 종교에 빠지고 이념에 물들고 되도 않는 이야기를 진리인 양 떠들어댔다. 지식은 뜨거웠으나 성글었다. 지식의 양은 방대했으나 겉돌았다.
어느덧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삶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살다가보니 성경책을 달달 외는 범죄자도 만났고, 일자무식의 지혜자도 만났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하느님이 성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지혜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혜는 줄여가는 것이다. 아는 것을 덜어내고 가진 것을 줄여가고 삶을 좀 더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무턱대고 위로만 오르려고 했던 나에게, 하지만 결코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한 나에게, 일침과 위로가 되었던 시가 있다. 『접시꽃 당신』이란 시집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도종환의 시이다. 제목은 ‘등잔’.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네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 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시집 『부드러운 직선』에 나오는 시다. 시집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부드러운 직선이라니? 네모난 동그라미 마냥 말이 안 된다. 모순이다. 직선의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점들의 모임이니 경직되고 딱딱할 수밖에 없다. 획일劃一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에는 단호하고 엄격하고 한치의 착오도 허용하지 않는 숨막힘이 있다. 직선은 그런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하지만 실제 세계에 적용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에 두 점을 찍고 가장 짧은 선을 그리면 곡선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데카르트가 그려놓은 좌표평면처럼 균일하고 일정하고 직선적이 아니다. 휘어져 있다. 휘어진 공간에 직선은 곡선이다. 부드럽다. 어머니 가슴처럼. 아인슈타인이 밝혔듯이 시간 또한 휘어져 있다. 쏜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에 꽂히듯이, 쏜살처럼 날아가는 시간 또한 부드럽다. 원래 자연은 부드러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만이 그 부드러움을 파괴하여 직선을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기계적인 직선의 세상을 다시 곡선으로 만드는 것이 시인이다. 본래의 결을 찾아내는 것이 시인이다. 자연 속에 직선은 곡선이다. 부드러운 직선!
샛길로 많이 나갔다. 다시 돌아오자. ‘등잔’으로.
도종환 시인의 ‘등잔’은 내려옴의 철학이다. 세상을 불태우고 자신을 불태우는 욕망의 불꽃을 잠재우고, 심지를 조금만 낮추자는 권유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그리 밝은 불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 속 빛만으로도 충분하다. 노자도 말한다.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온화하게 하고, 먼지와 하나가 되라.”
나이가 들면서 낮의 시간은 가고, 밤의 시간이 찾아왔다. 태양처럼 찬란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은은히 세상을 비추는 달빛이 있다. 그 빛만으로도 나의 길은 너끈히 갈 수 있다.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내가 아무리 부정을 해도 이제는 내려가야 할 때다. 낮은 곳으로 임하게 하소서! 기도해야할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