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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Oct 03. 2020

2020 독서노트 91 : 이수연 작가의 첫 단편소설집

이수연, <자화상> (독립출판물, 2020)

나는 마지막 자화상을 그려 그의 그림 옆에 걸었다. // 미소와 눈물. 현실과 비현실. 정교함과 투박함, 풍요와 빈곤. 빛과 어둠. 사랑과 이별. 그와 나. 모든 것이 그 그림 사이에 있었다. 두 그림은 같은 나이고, 같은 미소이고, 같은 기쁨과 슬픔이었다. 하늘과 바다. 나는 그의 세상에 함께하고 있었다.(54쪽)  

   

나는 그날, 새빨간 그림을 그렸다. 그렸다기보다 채워 나갔다. 아주 큰 캔버스를 가득 채울 정도로 붉은 물감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그 물감이 솟구쳐 나오는 동안 세상은 점점 조용해져 갔다. 머릿속부터 아득하게 멀어지는 소리는 내가 진정 원하는 정적. 그리고 그림. // 제목은 정해졌다. 완벽한 정적의 순간. // 이번 그림은 아주 아름다울 것이다.(164~5쪽)     


내가 운영하는 인문학 공유공간 <참새방앗간> 회원 중에 이수연이라는 작가가 있다. 《슬픔은 병일지도 몰라》(다산북스, 2019),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반니라이프, 2020) 등의 에세이를 썼다. 첫작품에서 에세이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신예작가이다. 이 작가를 만난 것은 내가 <작가의 글쓰기>라는 강연장에서 였다. 나는 강사로, 그는 학생으로 만났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은 나의 글쓰기 강좌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유튜버로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어, 올드매체만을 고집하는 나에게, 새로운 매체를 소개한 선생이기도 하다. 10월에는 김경윤×이수연으로 ‘콜라보’하여 유튜브 채널을 개설할 예정이다. 처음 방송은 술 한 병 먹을 때까지 자유롭게 토크하는 ‘술튜브(?!)’ 방송을 할 것이다.

이수연 작가는 에세이 작가로만 사는 것이 부족했는지, 스스로 1인출판사를 차리고, 편집기술도 익히고, 단편소설 3편을 써서, 텀블벅으로 예산을 마련하고, 편집, 디자인, 감리, 인쇄 전 과정을 홀로 해내면서 단편소설책을 출간냈다. 자신의 책을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 출간한 것이다. 게다가 이미 펀드를 받은 액수가 제작비를 넘었으니, 시작부터 수익을 얻은 셈이다.(참으로 부러운 용기와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기꺼이 값을 지불하고 그의 첫 단편소설집 《자화상》을 사서, 순식간에 읽었다. 순식간에 읽었다는 말은 그의 소설이 물흐르듯이 읽혔다는 것이다. 긴장감 넘치게 사건을 시작하여 전개하고 밀도있게 마무리하는 능력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소설은 흡인력이 있었다. 단편소설집에는 세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자화상>, <에코르셰>, <무제, 1970> 등이다. 이 중 <자화상>과 <무제, 1970>은 그림이 중요한 소재다. <자화상>은 사랑을 상실한 화자가 자화상을 그려가면서 자신을 회복하는 소설이고, <무제, 1970>은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각만 살리고, 청각(말)을 포기한 화가의 고뇌를 담고 있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이수연 작가의 독창적 생각이 반영된 작품이다.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얼굴. 에코르셰 기법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에코르셰>는 가히 충격적인 작품이다.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그 충격을 스포일하는 것이니 생략한다. 하지만 제목에 대해서는 힌트를 주어야겠다. ‘에코르셰(écorché)’는 프랑스말로 “인체나 동물 근육의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 피부 밑이나 근육의 노출된 상태를 그린 드로잉이나 판화, 조각 등을 일겉는 말”이다.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는 수많은 에코르셰가 있고, 현대화가 베르나르 뷔페는  에코르셰 기법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독립출판된 책이라 일반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터넷을 통해서 구입할 수도 없다. 독립출판물만을 다루는 독립서점에 배포될 예정이다. 혹시 우연히 이 책을 만날 수 있다면 구입을 강추한다. 우리는 괜찮은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나는 이수연 작가의 소설이 에세이보다 훨씬 좋다는 데 한 표를 던진다. 그가 다음 작품을 내게 된다면 누구보다 먼저 예약을 걸어놓을 것이다. 다음번에는 10편 정도 엮은 단편소설집이나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깊게 파고드는 장편소설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책은 독립출판형식이 아니라 일반출판이기 기대한다. 좋은 작품은 많은 사람이 읽을수록 더욱 좋기 때문이다. 이수연 작가의 건투를 빈다.  


<추가> 표지에는 작품사진 한 장만 덜렁 있고, 책 제목도, 작가 이름도 없다. 독립출판이기에 작가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다. 상식을 벗어난 참신한 발상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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